인류는 존재해 온 이래로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 왔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500년경까지의 아르카이크 시대 그리스 세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그리스 본토와 도리아·이오니아 섬들, 그리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연안 도시들에서 벌어진 국가 간 전쟁이 '제한된(limited)' 성격을 띠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러한 '제한적' 성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제한적 전쟁의 네 가지 특징
아르카이크 시대 그리스의 '제한적' 전쟁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1. 전투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합의
첫 번째 특징은 전투의 시간과 장소를 미리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전투는 특별히 선정된 지형이나 열린 평야에서, 사전에 약속된 시간에 벌어졌다. 매복, 기습 공격, 책략의 사용은 아르카이크 시대 전쟁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고전기에 등장한 정식 선전포고는 바로 이러한 전투 예고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사용 무기에 대한 합의
두 번째 특징은 사용할 무기에 대한 사전 합의였다. 어떤 무기로 싸울 것인지 미리 정했으며, 일부 무기는 금지되고 다른 무기는 허용되었다.
3. 대표 전사 간의 결투
세 번째 특징은 결투였다. 이 결투는 두 명 이상의 '대표 전사(champions)'가 맞서 싸우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때로는 300명씩의 집단이 겨루기도 했다. 결투는 교대로 진행될 수 있었으며, 그 목적은 사상자 수를 줄이는 데 있었다. 양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기를 걸고 승부를 벌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또한 결투는 전투의 일부로서, 전투 중이나 직전에 최전열의 '용사들'이 앞으로 나와 적에게 결투를 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형태의 결투는 특히 아르카이크 시대 초기에 두드러졌으며, 참전 인원을 제한하는 역할도 했다.
4. 중재를 통한 분쟁 해결
네 번째 특징은 중재를 통한 갈등 해결이었다. 중재자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일 수도 있고, 암피크티오니(Amphiktyonie) 같은 연합체나 도시일 수도 있었다. 이는 외교적 수단을 통한 분쟁 해결의 시작이었다.
아르카이크 시대 전쟁의 제한적 성격은 패자에 대한 보다 인도적인 대우에서도 드러난다. 포로와 패배자들은 더 이상 살해되지 않고, 노예로 삼아지거나 추방되었으며, 몸값을 받고 풀려나거나 때로는 몸값 없이 석방되거나 그냥 내버려두기도 했다. 전사자에 대한 대우에서도 이러한 인도성이 나타난다. 그들은 더 이상 전장에 방치되지 않고, 휴전 중이든 아니든 전장에서 옮겨져 매장되거나 화장되었다. 이러한 휴전은 전령(heralds)들이 주관했다. 전령의 또 다른 임무는 전투를 알리고 사용할 무기에 대한 합의를 주선하는 것이었다. 후대의 강화 조약은 바로 이러한 휴전에서 비롯되었다. 전령은 신성 불가침의 존재였으며, 사절과 메신저의 활동과 함께 교전 당사자 간의 소통을 담당했다. 덕분에 교전 쌍방 간의 접촉은 끊기지 않았다.
유사한 문화권들의 전쟁
그리스 본토, 도리아·이오니아 섬들, 소아시아의 그리스 연안 도시들에서 나타난 아르카이크 시대 국가 간 전쟁의 이러한 특징들은, 기원전 753년경부터 338년경까지의 로마, 기원전 800년경부터 300년경까지의 중국, 기원전 1000년경부터 서기 100년경까지의 인도, 서기 개시 전후 몇 세기의 켈트족과 게르만족, 그리고 원시 부족민들의 전쟁 방식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 원시 부족민들은 동일한 문화 단위에 속한 사람들이나 집단과 싸울 때는 갈등을 제한적인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들은 보통 변경 지역이나 명예를 두고 경쟁한다. 반면 이 문화 단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집단과 싸울 때는 아무런 제약 없이 싸운다. 이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 자체와 같은 실존적 문제를 두고 다투는 것이다.
문화적 통일성과 범헬레니즘
아르카이크 시대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카이크 시대 초부터 그리스 문화적 통일성, 즉 범헬레니즘적 감각,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암흑기(Dark Age) 말기의 인구 폭발, 폴리스(poleis, 도시 국가)의 발생과 여러 정착지의 융합, 비그리스인들과의 교역 접촉의 시작, 유관 언어의 보유와 알파벳의 도입, 호메로스 서사시 같은 그리스의 과거를 노래한 떠돌이 이야기꾼들의 활동, 명확한 신들의 세계를 갖춘 종교와 올림픽 경기 같은 축제와 체육 행사 등을 들 수 있다.
게다가, 혹은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아르카이크 시대 국가 간 전쟁의 제한 성격은 '범헬레니즘적 귀족주의'의 등장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암흑기 말기의 인구 증가로 바실레우스(basileus, 왕)를 중심으로 한 구 권력 구조가 작동하기 어렵게 되면서, 귀족 가문들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다. 귀족들의 권력 독점은 곧 전장에 대한 독점으로 이어졌다. 이는 그들이 대표 전사(champion) 역할을 수행한 것과 청동 파노플리아(panoplia)(갑옷)와 홉론(hoplon)(방패)의 등장이 결합된 결과였다. 이러한 변화는 다시 새로운 편제를 요구했고, 그것이 바로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였다. 팔랑크스는 오직 열리고 평탄한 지형에서만 운용 가능했기에, 호플리테스들은 이에 대해 합의한 뒤 전장으로 행군하여 진형을 갖추고 적을 기다렸다가 전투를 개시했다.
아르카이크 시대 그리스 국가 간 전쟁의 판돈은 국경 획정과 명예였다. 인구 증가로 정착지들이 서로 맞닿게 되면서 국경 획정이 필요해졌다. 한편 명예는 전장에서나 운동 경기장에서나 늘 귀족들이 다투던 핵심 가치였다. 귀족적 아르카이크 문화를 특징짓는 경쟁 의식은 아르카이크 시대 내내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와 폴리스 전반으로 확산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