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500년 전 역사가 남긴 경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성탄 메시지에서 부패한 성직 체계인 쿠리아를 빗자루로 쓸어내겠다고 노골적으로 밝혔습니다. 이어진 미약한 박수는 참석한 추기경들이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교황이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아름다운 이야기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며, 미래를 위한 경고가 되기도 합니다. 그보다 사소한 이유로도 교황들은 의심스러운 상황 속에서 세상을 떠나곤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해를 맞아 곧바로 행동에 나섰습니다. 스무 명의 새 추기경을 임명했는데, 그중 다섯 명은 자선 활동을 위해 특별히 지명된 인물입니다. 새 추기경들은 주요 교구가 아닌 세계 각지에서 선발되었습니다.

바티칸의 최근 조치 중에도 같은 방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2015년 1월 1일부터 기념품 상점에서는 교황의 개인 축복이 담긴 양피지를 판매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원래 10유로 안팎에 인쇄본을 구할 수 있었고, 이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습니다. 판매 수익은 여전히 바티칸의 자선 사업에 쓰이지만, 이 소식은 약 500년 전 면죄부 남용에 대한 항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에는 충분한 돈만 내면 죄를 '사 버릴'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종이에 담긴 축복 판매 관행 전체를 폐지하는 데 성공할지, 역사가 반복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장 강력한 비판은 지난 성탄 메시지에서 나왔습니다. 겸손한 '민중의 교황'은 자신의 통치 기구인 쿠리아 내 성직자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기적인 험담꾼들, 권력 축적에만 몰두하는 자만 가득한 이들. 그들은 삶을 고쳐야 하며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지금은 '영적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말씀이 아닌가요?

반복되는 항의

루터와 칼뱅 같은 유명한 종교개혁가들도 16세기에 가톨릭 성직자들의 각종 폐단을 혐오했습니다. 면죄부, 권력을 좇는 고위 성직자들, 독신 서원의 무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사제들 등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위 성직자와 교황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유일한 네덜란드 출신 교황인 아드리아노 6세(1522~1523년 재위)도 교회 내부의 만연한 폐단에 손을 쓰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즉위 1년 반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독살 소문이 곧바로 퍼졌지만 끝내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전임자 레오 10세는 독살로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는 권력 다툼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새 교황 아드리아노 6세는 로마에 도착했을 때 텅 빈 금고를 마주했습니다. 전임 교황들은 윤택하게 살았습니다. 예술과 사치에 둘러싸여 최고급 직물, 최상의 포도주와 진귀한 요리에 빠져 지냈던 것입니다. 아드리아노는 이 흐름을 뒤집었고, 곧 바티칸이 수도원으로 변해 교황과 집사가 대구와 맥주만 먹는다고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스티나 천장화나 초기 교황들을 찬양하는 작품 등 수많은 예술 작품은 아드리아노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새로운 작품 의뢰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황은 모든 것을 하얗게 덧칠해 버리고 싶어 했다고 전해집니다. 교황청의 지출에 의존하던 로마 경제에는 악재였고, 아드리아노는 이런 이유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눈에 띄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일부 성직자들이 누리는 사치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황 궁전의 호화로운 방 대신 더 소박한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방향을 바꿔야 할 때

잠시 아드리아노에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가톨릭 교회에 대한 항의문을 못 박았을 때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이전에도 폐단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교회는 언제든 그것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쇄술의 등장과 함께 이러한 고발문이 널리 퍼지면서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닿았고, 종교개혁가들은 더 많은 지지자를 얻게 됩니다. 아드리아노는 1522년 뉴른베르크 제국의회에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쿠리아 내부의 폐단에 대해 루터와 같은 입장이었음을 드러냈습니다. (제국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수백 명의 제후와 고위 성직자가 참여하는 통치 회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전, 루터는 전임자 레오 10세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습니다.

아드리아노의 성명은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이 처음으로 교회 내부의 폐단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개선을 약속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이 다시 이런 일을 하기까지는 20세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먼저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 교회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해 입을 열었고, 그다음 베네딕토 16세가 뒤를 이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교회 내 성추행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이 명예교황은 아직 생존해 있지만 사임했기 때문에 더 이상 최고의 영적 실권을 쥐고 있지 않습니다.

교황에게 위험한 시대

역사가 보여주듯, 교황으로서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살해가 소문으로 덮여 묻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솔리니와 파시즘에 맞섰던 피우스 11세를 보십시오. 그는 나치의 인종 박해와 독일의 전쟁 위협에 관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던 전날 밤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1972년 티세랑 추기경은 피우스 11세가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다행히 오늘날 이탈리아에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제거하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길을 계속 걸으며 개혁을 밀어붙인다면, 과거로부터 배워 시식꾼이라도 고용하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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