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독일은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된 지 50주기를 맞아 기념 행사를 열었습니다. 1961년 8월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이를 강하게 규탄했지만,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공개된 CIA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부는 오히려 장벽의 '이점'까지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영구적으로 분리하기 위해 장벽을 세우기로 결정하자, 케네디 대통령은 이를 "자국민을 감옥에 가두는 비인도적 행위"라고 규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기밀이 해제된 미국 정보 문서들은 미국 정부가 실제로는 겉으로 내세운 것만큼 장벽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문서들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 산하 국가안보아카이브(National Security Archive)가 미국판 공공정보법이라 할 수 있는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을 근거로 열람을 요청해 온라인에 공개한 것들입니다.
케네디의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는 장벽이 오히려 베를린 지역의 안정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다른 고위 관료였던 주소련 미국 대사 르웰린 톰슨(Llewellyn Thompson)은 베를린 위기가 불거지기 몇 주 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와 서독은 모두 동독 난민들이 동독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습니다."
극도로 긴장된 상황
서방 정보기관은 동독 시민들이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의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으로의 통행을 영구 차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난민 위기와 '오늘이 마지막 탈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동베를린 전체를 흔들었고, 이미 긴장 상태였던 분단 독일에서 소련의 신경을 더욱 곤두세웠습니다.
1960년대 초, 공산권 동독은 경제적 파탄 직전에 있었습니다. 매일 수백 명의 주민들이 가난과 독재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 동베를린에서 자본주의 진영인 서베를린으로 넘어갔습니다.
동베를린이 말 그대로 텅 비어갈 위기에 처하자, 동독의 실질적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와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국경 봉쇄를 결정합니다.
미국과 서독 정보기관은 탈출을 막기 위한 '강경 조치'가 예고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울브리히트는 이미 8월 10일 연설에서 "여기까지이며 더 이상은 없다"는 선언을 했지만, 8월 13일 동독이 실제로 장벽 건설에 착수하자 서방 정보당국은 놀랐고, 케네디 대통령 역시 사전에 제대로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행동이 아닌 말뿐인 규탄
결국 미국 정부는 장벽 건설을 구두로만 규탄하는 데 그쳤습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공산당 당국은 시민들이 강압의 세계 대신 자유로운 세계를 선택할 권리마저 빼앗고 있습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 멈췄습니다. 미국은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독 주민들이 더 이상 국경을 넘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지역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동독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후반, 소련이 연합군의 서베를린 철수를 요구하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서베를린 시정부는 미국이 자신들의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벽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자 크게 당혹스러워했습니다.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케네디는 부통령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을 베를린에 파견해 서베를린 시민들을 격려했습니다. 케네디 본인이 직접 베를린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63년 6월 26일, 역사에 남는 유명한 연설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