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여름, 1936년. 사회주의 지도자 레옹 블룸(Léon Blum)은 프랑스의 총리였다. 그해 4월 치러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인민전선 연합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사회주의까지
변호사였지만 서평과 연극 평론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블룸은, 확고한 지지자였던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발을 들였고, 장 조레스(Jean Jaurès)에 대한 깊은 경모 속에 사회주의로 나아갔다. 그해 8월에는 스페인 내전이 터지고 불과 3년 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격랑의 시대였다. 프랑스 같은 강대국의 정부 역할은 결정적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사회정의를 수호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교 무대에서 세계 평화를 옹호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블룸의 짧은 정권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연합 내부의 이견—특히 스페인 내전을 둘러싼 갈등—과 우파의 맹렬한 반대에 시달린 끝에, 역사에 남은那句 “블룸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는 구호 속에서 결국 총리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후 1942년에는 배신적인 비시 정권으로부터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책임자’(!)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다.
레옹 블룸의 정책은 사회주의 원칙과 일치했다. 그는 독일·이탈리아 추축국의 팽창하는 세력에 맞서면서 전쟁 산업과 프랑스 은행을 국유화했다.
유급휴가, 특권이 아닌 권리가 되다
하지만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이런 일들 때문만이 아니다. 블룸 정권은 주 40시간 노동제, 단체교섭과 단체협약 등 굵직한 사회 개혁과 함께 근로자의 유급휴가, 곧 ‘유급 휴식’을 처음으로 법제화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 연합은 관련 법안을 프랑스 의회에 제출했고, 같은 달 20일 통과되었다. 우파 반대세력이 이를 가볍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악명 높은 1942년 재판에서 블룸은 이 일에 대해서도 변명해야만 했다.
“나는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잃게 하고, 유흥과 안락의 기풍을 부추겼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오락은 게으름의 학교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 뒤에 오는 휴식이며, 자신에게서 단절되고 소외되었던 육체적 삶과 노동자가 다시 화해하는 일종의 과정이다.”
블룸은 ‘유급 휴식’에서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사회 여가부를 신설하고 자신의 젊은 의원 중 한 명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 “노동으로 세계의 능동적 힘이 되어온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노동이 낳는 모든 꽃, 문화가 주는 모든 즐거움, 예술이 주는 모든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이 특히 여름철에 누리던 소박한 낙원은 “더 이상 향수의 대상이 아니었고, 시인의 말처럼 ‘보상’조차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권리였다”(엘리티스, 『작은 나우틸루스』). 성찰할 권리, 탐구할 권리, 고양될 권리였다.
오늘날의 노동 대중—생산직 노동자부터 사무직, 중간 관리층까지—은 블룸의 시대에 필적하는 불확실성에 공포를 느끼며, 같은 사슬과 같은 의제를 안고 있다. 우파 정권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성과를 무너뜨리는 가운데, 블룸의 정적들로 하여금 “히틀러가 더 낫다”고 외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체계의 반사작용이 되살아나고 있다. 단체교섭과 단체협약은 흐지부지되었고, 하루 8시간 노동은 ‘이념’으로 치부되었으며, 10시간 노동제는—오스트리아를 보라—이미 현실 앞에 있다.
82년 뒤 서구에서 진행 중인 끔찍한 원시적 축적은 이미 1936년 6월의 소박한 낙원을 유럽인에게서 빼앗아 갔다. 남은 것이 얼마 없는 유급휴가의 유산조차, 머잖아 유럽 전역의 ‘지배자의 권리’를 쥔 이들이 사회에서 걷어내겠다고 선언할 새로운 ‘이념’이 될지 모른다.
그의 인품에 쏟아진 보편적인 존경
블룸은 총리직에 불과 1년 머물렀다. 1937년 6월, 보수 다수파 상원이 국가 경제 위기를 다룰 긴급 권한 부여를 거부하면서 그는 사임했다. 이후 정권 재구성 시도가 있었고, 블룸은 1938년 한 달간 다시 총리로 복귀했다. 그러나 결국 인민전선은 해체되고 말았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함께 비시 정권은 패전의 책임자라는 혐의로 블룸을 체포했다. 그러나 명웅변가였던 블룸과 함께 기소된 동료들은 법정을 자신들을 고발한 자들을 통렬하게 고발하는 무대로 바꾸어 놓았다. 독일은 이 전개에 분노해 재판을 중단시키고 블룸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으며, 그는 1945년 미군에 의해 그곳에서 해방되었다.
프랑스 해방 후, 보편적인 존경을 받던 블룸은 1946~47년 한 달간 순수 사회주의 계열의 과도정부를 이끌었으며,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