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에게 사절단을 파견해 화친을 제안했다. 조건은 화려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절반, 1만 탈렌트의 금화, 자신의 딸과의 혼인, 그리고 영원한 우호와 동맹이었다.
회담 자리에서 노장 파르메니온 장군은 강하게 권유했다. "당신의 아버지 필리포스조차 이런 제안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렉산더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알렉산더의 대답은 냉철했다. "나도 파르메니온이라면 받아들였겠지."
결국 그는 다리우스의 제안을 거절했고, 세계 정복의 길을 걷게 된다.
위대한 정복자의 탄생과 성장
알렉산더는 기원전 356년 7월 20일 또는 21일,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2세, 어머니는 에피루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 올림피아스였다. 아버지에게서는 예리한 통찰력, 조직력, 신속한 행동력을, 어머니에게서는 야망과 자존심, 강한 의지를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에는 몰로소스의 레오니다스와 아카르나니아의 리시마코스에게 기초 교육을 받았고, 13세에는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그리스적 이상을 가르쳤고, 그리스 문명과 정신에 대한 깊은 사랑을 심어주었다. 알렉산더는 평생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잊지 않았으며, "아버지에게는 생명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삶을 배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정치와 전략의 실질적인 가르침도 받았다. 외국 사절과의 면담에 항상 곁에 있었고, 원정에 따라나가며 군사학을 익혔다. 덕분에 어린 나이에도 정치적·군사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16세에는 원정 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트라키아계 메이디족의 반란을 진압했고, 18세에는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 8월 2일)에서 군단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무용을 과시했다.

기원전 336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20세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를 노린 조직적인 음모가 끊이지 않았지만, 알렉산더는 번개 같은 속도로 이를 분쇄했다. 필리포스의 죽음 소식에 반기를 든 남부 그리스 도시들 역시 그의 신속한 진군 앞에 복종을 선언했다. 코린토스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아버지처럼 그리스의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페르시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기 전, 그는 먼저 왕국의 안보를 확보했다. 기원전 335년 마케도니아 북방의 야만 부족들을 토벌하고 다뉴브강까지 진격한 뒤 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테베와 아테네가 재차 반란을 일으키면서 남부 그리스로 두 번째 출병해야 했고,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비로소 원정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동방 원정: 그라니코스부터 가우가멜라까지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에 안티파트로스를 섭정으로 남겨두고 보병 5만과 기병 6천으로 출정했다. 트라키아를 거쳐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도달했고, 전함 120척을 포함한 함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로 건너간 그는 영웅 아킬레우스의 무덤을 참배하며 기도와 제사를 올렸다.
페르시아군은 그라니코스강 기슭에 집결해 있었다. 마케도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의 첫 전투는 기원전 334년 5월 22일 그라니코스에서 벌어졌다. 알렉산더는 직접 선두에 서서 페르시아 최정예 기병들과 맞붙었고, 여러 차례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마케도니아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흩어져 후퇴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그는 남진하여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기원전 334년 겨울에는 상가리오스강 기슭의 고르디온에서 월동했는데, 그곳 왕궁에는 유명한 '고르디오스의 매듭'이 걸려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한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검으로 단숨에 잘라버렸다.
기원전 333년 봄,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 킬리키아에 진입한 그는 타르수스를 점령하고 군대를 쉬게 했다. 키드노스강의 찬물에 목욕한 뒤 병을 얻었으나 빠르게 회복되어 시리아를 향해 진군을 이어갔다. 그러다 50만으로 추산되는 페르시아 대군과 두 번째로 조우해 이소스 근처에서 격돌했다(기원전 333년 11월 12일). 페르시아군은 궤멸적으로 패배했고, 다리우스 왕은 도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알렉산더는 풍성한 전리품과 함께 다리우스의 가족을 포획했지만, 그들을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다리우스를 추격하는 대신, 알렉산더는 남진하여 지중해 연안 전역을 장악하고 페르시아 함대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차례로 점령했으며, 사막 속 암몬 신전에서 제사장들은 그를 새로운 제우스로 환영했다. 나일강 하구 근처 무역의 요충지에 알렉산드리아 건설을 결정했고, 직접 성벽과 거리 설계에 참여했다.
이집트에서 아시아로 돌아온 알렉산더는 기원전 331년 10월 1일, 티그리스강 건너 가우가멜라에서 재편성된 페르시아 대군과 조우해 이를 완파했다. 다리우스는 또다시 도망쳤으나 이후 박트리아 총독 베수스에게 살해당했다. 페르시아 최대 도시들인 바빌론, 수사, 그리고 다리우스의 궁전이 있던 페르세폴리스가 차례로 항복하며 페르시아 전역이 알렉산더의 손에 들어갔다.
정복의 끝, 그리고 3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에서 멈추지 않았다. 동방의 부족들을 복속시켜 거대한 제국을 미래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를 넘어 기원전 327년 인도에까지 진군했고, 포루스 왕을 격파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극심한 피로에 지쳐 더 이상의 진격을 거부하면서, 그는 서사시 같은 동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군대의 일부는 제독 네아르코스의 인솔로 함대를 통해 페르시아로 귀환했고, 그 자신은 나머지 병력과 함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해 수사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가 허기와 갈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귀환 후 그의 관심사는 제국의 통치로 옮겨갔다. 페르시아인들의 생활 방식과 통치 체계를 연구한 결과, 그는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려면 페르시아 귀족과 그리스인의 융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스로 그리스-페르시아의 왕을 자임하며 그들의 의복과 생활 양식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324년에는 다리우스의 딸 스타테이라와 그녀의 조카 파리사티스와 결혼했고, 장교와 병사들에게도 페르시아 여성과의 결혼을 권장했다. 그보다 앞선 기원전 327년에는 장군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박트리아 지배자의 딸 록사네와 혼인했다. 록사네는 그의 유일한 핏줄 알렉산더 4세를 낳았으나, 이 아이는 아버지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태어나 12세에 왕위를 찬탈한 카산드로스의 명령으로 살해당한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알렉산더의 이러한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실제로 일부 장군들은 음모를 꾸몄고, 알렉산더는 이를 적발해 수괴들을 엄중히 처벌했다. 방대한 통치 업무와 과로, 그리고 가장 친한 벗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은 그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결국 알렉산더는 중병에 걸려 기원전 323년 6월 10일 또는 11일, 바빌론에서 불과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거대한 제국은 장군들에게 분할되었고, 그들은 오랜 세월 세력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문화적 유산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정복은 그리스 세계와 동방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고, 그리스 문화는 아시아와 이집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어는 국제 공용어가 되었고, 그리스의 풍습은 당시 알려진 세계 곳곳에 뿌리내렸다. 이렇게 탄생한 '헬레니즘 문명'은 그리스 정신의 또 하나의 찬란한 절정이었다. 역사가 그의 거대한 업적을 기려 알렉산더를 '대왕(The Great)'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