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짐 모리슨, 그의 무덤에 그리스어 비문이 새겨진 이유

1971년 7월 3일, 로큰롤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 중 하나인 짐 모리슨(Jim Morrison)이 27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뛰어난 공연가이자 가수, 작사가이자 더 도어스(The Doors)의 프론트맨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이었던 그는, 자신이 남긴 모든 행동과 작품으로 강렬한 흔적을 새겼다.

'도어스'라는 이름의 유래

모리슨은 밴드 이름 '도어스'를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책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따왔다. 이 책은 다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중 "만약 지각의 문이 깨끗이 씻긴다면, 만물은 인간에게 본래의 모습, 곧 무한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밴드의 정체성까지 결정한 셈이다.

끊임없는 이주 속의 성장기

'리저드 킹(Lizard King)'이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제임스 더글러스 모리슨은 1943년 12월 8일 미국 플로리다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 스티븐 모리슨은 해군 제독이었고, 어머니는 클라라 클라크 모리슨이었다. 그는 군인 가정의 장남이었다.

네 살 무렵 그는 사막 한복판에서 벌어진 교통사고를 목격했는데, 이 사고로 원주민 가족의 일원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그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고, 훗날 그의 가사 소재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가족은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고, '짐'은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자랐다. 1964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에서 미술학 학위를 취득했다. 재학 중에는 두 편의 단편 영화를 직접 제작했고, 대안 언론인 『로스앤젤레스 프리 프레스(LA Free Press)』와도 협력했다.

더 도어스의 결성과 전성기

그는 UCLA 동기였던 레이 만자렉(Ray Manzarek)과 함께 더 도어스의 최초의 두 멤버가 되었다. 이후 드러머 존 덴스모어(John Densmore)와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Robby Krieger)가 합류하며 전설적인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모리슨이 이끄는 밴드는 상업적·예술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여섯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두 장의 앨범을 더 내놓았으나, 밴드는 1973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짐 모리슨, 그의 무덤에 그리스어 비문이 새겨진 이유

파리에서 온 죽음의 소식

1971년 7월 3일, 모리슨은 파리의 임대 아파트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이는 연인 팸 커슨(Pamela Courson)이었다. 부검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다. 커슨의 주장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헤로인을 코카인으로 착각하고 복용한 우발적 과다복용 탓이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커슨 본인도 3년 뒤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감했다. 짐 모리슨은 파리 동부의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 묘지에 안장되었다.

무덤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어 비문

1990년대, 아버지 조지 모리슨은 아들의 무덤 위에 대리석 비석을 세웠다. 그곳에는 고대 그리스어로 "κατὰ τὸν δαίμονα ἑαυτοῦ", 즉 "자신의 다이몬(daimon)에 따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느슨하게 풀면 "자신의 영혼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읽힌다.

여기서 '다이몬'이란 고대 그리스에서 운명 또는 신령한 존재를 가리키던 개념으로, 경배를 받는 신이라면 누구든 이렇게 불렸다. 개인의 수호신, 오늘날의 '수호천사'와 같은 존재는 바로 이 '자아의 다이몬'을 통해 묘사되었으며, 그것은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잇는 통로이기도 했다.

"나는 자아의 다이몬에 따라 행동한다"는 말은 곧 "나는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아들의 무덤에 남긴 이 문구는, 위대한 가수가 짧은 생애 동안 오직 양심만을 따랐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사회가 어떤 규범을 강요하든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비문은 그의 타협 없는 성품을 완벽하게 요약한 문장인 셈이다.

보수 사회와의 충돌

시대의 상징적인 프론트맨이었던 모리슨은 무대 위에서 미국의 보수적 관습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활동 기간 동안 공연 중 선정적 행동 등을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고, 도어스의 콘서트는 공공질서를 해친다는 명분으로 금지당하기도 했다.

특히 1969년 봄 마이애미 콘서트에서 공개적으로 신체를 노출한 혐의에 대해, 그는 1970년 9월 20일 6개월의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다. 항소 계류 중 세상을 떠난 그는 결국 형을 복역하지는 않았다.

시인으로 살다, 시인들의 곁에 잠들다

1971년, 모리슨은 미국 내에서 형성된 자신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를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연인 팸 커슨(1946~1974)과 함께 파리에 정착해 시 창작에 몰두했다. 그로부터 1년 전인 1970년에는 그의 시집 『주군들과 새로운 피조물들(The Lords and the New Creatures)』이 출간된 바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파트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그는 페르 라셰즈 묘지의 '시인들의 구역'에 안장되었으며, 발자크, 몰리에르, 오스카 와일드가 바로 그 곁에 잠들어 있다.

의식의 확장, 그리고 무의식의 어둠

다른 사이키델릭 음악 아티스트들이 신비주의 쪽으로 기울었던 것과 달리, 모리슨은 의식의 확장을 인간 무의식의 어두운 영역, 즉 인정받지 못한 욕망들을 파헤치는 방법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음악과 시는 단순한 환각적 분위기를 넘어, 인간 존재의 이면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통찰로 가득 차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의 무덤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