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월 11일, 갈레아초 치아노의 마지막 순간

서재에서 작업 중인 모습의 갈레아초 치아노
1944년 1월 11일, 한겨울의 차가운 아침. 베니토 무솔리니의 딸 에다와 1930년 결혼하여 사위가 된 갈레아초 치아노(Galeazzo Ciano)가 북이탈리아 도시 베로나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40세였다. 그와 함께 최후를 맞은 이들은 에밀리오 데 보노, 루차노 고타르디, 조반니 마리넬리, 카를로 파레스키로, 이들은 모두 1943년 7월 25일 열린 파시스트 대평의회 회의에서 무솔리니를 실각시키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진, 이른바 '두체를 실망시킨 배신자'들이었다.
정권의 부동의 2인자에서 사형수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고 어두운 면 또한 없지 않았던 치아노는 한때 무솔리니의 후계자, 즉 '델피노(Delfino)'라 불리며 이탈리아 최연소 외무장관을 지냈다. 파시스트 정권의 부동의 2인자로 군림했던 그였지만, 결국 독일과의 동맹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 입장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히틀러가 밀어붙인 베로나 재판
이탈리아 근현대사의 슬픈 한 페이지를 놓고 수많은 말과 글이 쏟아졌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치아노의 목숨을 거두라고 강하게 밀어붙인 것은 무솔리니 자신이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였다는 사실이다. 1944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진행된 소위 '베로나 재판'에서 치아노 등은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무솔리니는 독일의 압박 속에서 마지막까지 사위를 구할지 고민하다 결국 처형을 승인하고야 말았다.
폭풍우 속에 남긴 유언
세상을 떠나기 직전, 치아노는 감옥 사목을 맡았던 키오티 몬시뇰(Monsignor Chiot)에게 자신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내 아이들이 알기를 바란다. 나는 누구에게도 원한 없이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같은 폭풍우 속에 휩쓸려 있는 것이다."
처형의 참혹한 장면은 독일군 촬영 요원이 필름에 통째로 담아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인터넷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너무나 잔혹한 내용이라 이 글에는 싣지 않기로 했다.
남겨진 것은 일기장이었다
치아노는 죽음을 앞두고까지 파시즘 정권의 내막을 꼼꼼히 기록한 일기를 남겼다. 그의 아내 에다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이 일기를 들고 자녀들과 함께 스위스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고, 훗날 공개된 '치아노 일기'는 무솔리니 정권의 실상을 폭로하며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처형대 위에서도 가족을 걱정하며 원한 없이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 말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한 인물의 비극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