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1월, 아돌프 히틀러가 주도한 '맥주홀 폭동(뮌헨 폭동)'이 무참히 좌절되면서 나치당 지도부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나치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은 폭동 실패 후 어떤 운명을 겪었을까요?
폭동 현장에서 입은 중상, 그리고 망명
괴링은 뮌헨 시내 행진 도중 경찰의 발포에 총탄을 맞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체포를 피해 그는 곧장 오스트리아로 국경을 넘었고, 이후 스위스를 거쳐 스웨덴으로 피신했습니다. 스웨덴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진통제인 모르핀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건강과 성격에 오랫동안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부재중 재판과 귀국
괴링이 망명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뮌헨에서 열린 폭동 관련 재판에서 그는 부재중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괴링 자신은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지 않았습니다. 란츠베르크에서 복역하며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한 사람은 히틀러이며, 이 책은 히틀이 루돌프 헤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저작입니다.
1927년 독일 정부의 사면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괴링은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제국원수로 부상하다
귀국 후 괴링은 빠르게 정치적 입지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나치당 의석 확보에 크게 기여했고, 1932년에는 독일 국회의장에 올랐습니다. 1933년 나치 정권 수립 이후에는 프로이센 주 총리를 맡아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 설립에 앞장섰으며,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총사령관으로서 군사력 재건을 이끌었습니다.
1940년에는 '제국원수(Reichsmarschall)'라는 특별한 계급을 부여받으며 나치 독일 최고위 군인이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정되기까지 했습니다. 한때 망명자 신분이었던 그가 나치 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로 성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