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999년 7월, 코소보를 뒤흔든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과 그 후일담

1999년 7월 중순, 코소보의 풍경

1999년 7월 17일 무렵 코소보에서는 이미 78일간의 전쟁이 끝난 뒤였습니다. 같은 해 6월 10일 체결된 쿠마노보 협정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FRY) 폭격이 종료되었고, 그 여름 코소보에서는 평화유지군(KFOR)의 전개와 함께 수십만 명의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태의 시작점은 바로 NATO의 '동맹군 작전(Operation Allied Force)'이었습니다.

왜 폭격이 시작되었나: 코소보 위기의 배경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집권하고 있었으며,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정부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던 코소보 알바니아계 게릴라와 민간인에 대한 강경 진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면서 인도주의적 위기가 날로 깊어져 갔습니다.

서구 열강은 코소보에 실질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평화협정을 제안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끝내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NATO는 외교적 해결이 좌절되자 군사적 개입에 나섰습니다.

78일간의 폭격, '동맹군 작전'

NATO는 1999년 3월 24일 공중 폭격 작전을 공식적으로 개시했습니다. 이후 같은 해 4월 23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평화협정 서명을 계속 거부함에 따라 폭격 강행 방침이 재확인되었습니다.

작전은 총 78일간 이어졌으며, 1999년 6월 10일 쿠마노보 협정의 체결로 공식 종료되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유고슬라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고, NATO 주도의 평화유지군(KFOR)이 해당 지역에 배치되어 질서 회복 임무를 맡았습니다.

폭격이 남긴 상흔

인명 피해와 기반 시설 파괴

폭격으로 수백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다리·발전소·통신 시설 등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핵심 기반 시설이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5월에는 주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이 오폭격을 당해 국제적인 외교 파장이 일기도 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이재민 발생

전쟁 기간 동안 코소보에서 수십만 명이 집을 잃고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피해 도피한 알바니아계 주민들이었습니다.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야 이들은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이어지는 논쟁

이번 개입은 서구 사회의 여론마저 양분시켰습니다. 한편에서는 코소보의 인도주의적 참극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개입을 지지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이 주권국가를 공격한 침략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인도주의적 개입'의 정당성을 둘러싼 이 논쟁은 오늘날 국제정치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