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 3월 5일 보스턴에서 발생한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은 영국군 병사들의 발포로 식민지 주민 다섯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미국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당시 미국 사회를 양분하던 두 진영에서 완전히 엇갈렸습니다. 독립을 추구하는 애국파(Patriots)가 이를 '학살'로 규정하며 반영(反英) 여론을 부채질한 반면, 영국 통치를 지지하던 충성파(Loyalists)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봤습니다.
"먼저 폭력을 일으킨 것은 주민들이다"
충성파들은 보스턴 학살을 유감스러운 비극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책임이 영국군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행동한 식민지 주민들에게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명확했습니다. 군중이 먼저 병사들을 모욕하고 위협하며 소란을 피웠고, 영국군 병사들은 극한 상황에서 정당한 자위권을 행사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충성파들은 주민들이 이번 사건을 이용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추진하려 한다고 의심했습니다. 즉, 단순한 사고를 독립 운동의 선전 도구로 활용한다는 비판적 시각이었습니다.
보스턴 주둔 영국군은 필요한 존재였다
많은 충성파들은 보스턴에 영국군이 주둔하는 것 자체에 항의한 주민들의 태도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영국군의 주둔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식민지를 보호하고 치안과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충성파들은 주민들이 영국 의회의 세법이었던 타운젠드 법(Townshend Acts) 준수를 거부한 것을 들며, 이러한 태도가 영국의 권위에 대한 존중 결여를 보여준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에게 난폭한 시위와 저항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었습니다.
과장되고 선전에 가까운 묘사에 대한 비판
충성파들은 애국파가 사건을 묘사한 방식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실제 폭력의 규모가 과장되었고, 정당방위에 가까웠던 영국군 병사들이 마치 고의적인 살인자처럼 그려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폴 리비어(Paul Revere)의 판화 등 당대의 시각 자료들은 사건을 극적으로 왜곡하여 대중에게 배포되었는데, 충성파는 이런 종류의 이미지가 반영 감정을 부추기고 독립 요구를 정당화하는 선전물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사건, 정반대의 해석
요컨대 충성파에게 보스턴 학살은 영국 권위에 대한 주민들의 무모한 도전이 빚어낸 비극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들은 폭력의 책임이 주민들에게 있으며, 영국군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을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이 이 사건을 독립 운동의 명분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입장은 재판 과정에서 일부 현실성을 얻었습니다. 훗날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는 변호사 존 애덤스(John Adams)가 영국군 병사들의 변호를 맡았고, 대부분의 병사는 무죄 또는 경범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는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역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