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블루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는 1960년대 초, 훗날 영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그룹 중 하나인 블루스 인코포레이티드(Blues Incorporated)를 결성했다. 당시 흑인 음악에 여전히 적대적이었던 대서양 건너편 땅에서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 그룹을 거쳐갔고, 더 많은 이들이 코너에게 음악을 배웠다.
사실상 원맨 프로젝트나 다름없던 이 그룹에는 잭 브루스와 진저 베이커—훗날 크림(Cream)의 3분의 2—를 비롯해, 때때로 무대에 올라 함께 연주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미 페이지와 존 메이올, 로드 스튜어트,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인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브라이언 존스까지 말이다.

블루스 인코포레이티드는 런던의 전설적인 공연장,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마키클럽(Marquee Club)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공연을 이어갔다. 이곳은 이후 수십 년간 펑크와 영국 헤비메탈 뉴웨이브 등 수많은 음악적 흐름을 품어준 곳이기도 하다.
우연이 만든 첫 무대
그런데 1962년 어느 목요일, 코너의 밴드가 BBC 라디오 '재즈 클럽' 프로그램의 초청으로 라이브 방송에 출연하게 되면서 마키클럽 공연이 어려워졌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고 당연히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클럽 주인까지 그들의 예술적 열정에 공감해주리라는 법은 없었다.
"이번 목요일에 공연하지 않으면, 다시는 내 가게에서 연주할 수 있다고 장담 못 한다." 그는 관리자 특유의 차가운 어조로 잘라 말했고, 밴드는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빠르게 자신들을 대신해야 했다.
결국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브라이언 존스, 피아니스트 이안 스튜어트, 베이시스트 딕 테일러가 대타로 무대에 섰다. 이렇게 해서 1962년 7월 12일, 롤링 스톤즈의 첫 공연이 탄생했다.
라이브 직전, 재거는 지역 신문 '재즈 뉴스(Jazz News)'를 통해 언론과의 첫 입장을 밝혔다. "우리를 록앤롤 밴드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들으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발언이지만, 당시에는 미국식 50년대 록앤롤이 아니라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는 밴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같은 신문에서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 이름도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렸다. 정확히는 '믹 재거 앤 더 롤린 스톤즈(Mick Jagger and the Rollin' Stones)'였다.

110명의 관객, 50분의 역사
흥미롭게도 그날 밤 드럼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밴드의 일부 지인들은 초기에 자주 함께 연주했던 토니 채프먼이라고 말하지만, 키스 리처즈는 자서전에서 나중에 킹크스(Kinks)의 드러머가 되는 믹 에이버리의 친구였다고 적었다.
가디언(The Guardian)에 따르면, 밴드는 홍보 기간이 극히 짧았음에도 110명(남성 80명, 여성 30명)의 관객 앞에서 50분간 공연을 선보였고,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공연 후 그들은 토튼텀의 펍으로 무대를 옮겨 브랜디와 위스키를 이어 마셨는데, 사실 이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도 긴장을 풀기 위해 같은 술을 마셨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6개월 뒤 드럼 자리를 영구적으로 차지하게 되는 찰리 왓츠도 함께 있었다.
리처즈는 자서전에서 그날 밤을 회상하며 'Dust My Broom', 'Confessin' the Blues', 'Got My Mojo Working' 등 블루스 넘버들의 코드를 손가락으로 넘겼다고 적었다. 바로 그 음악이 몇 년 전부터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옛 동창생 재거를 다시 자신 곁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몇 명과 함께 앉아 연주를 하다 보면 '오, 이거야!' 하는 순간이 찾아와. 이 감각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지." 그는 썼다. "잠시 이 행성을 떠났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어. 그때는 아무도 너를 건드릴 수 없어... 허가 없는 비행 같은 거지."
50주년, 두 사람의 다른 회고
2012년, 밴드가 첫 라이브 50주년을 기념하고 있을 때 롤링 스톤(Rolling Stone)은 그들을 찾아가 마키클럽에서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촬영에 앞선 대화에서 재거는 7월 12일의 '기념 행사'에 대해 솔직히 다소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우리가 좀 억지로 기념하는 게 아닌가' 싶거든." 그는 미안한 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의 밴드와 지금은 같지 않으니까. 물론 이름은 여전히 같지만. 그 밴드 멤버 중 지금도 남아 있는 사람은 나랑 키스뿐인 것 같아. 찰리의 첫 라이브가 언제였는지 알아보려 했는데, 우리 중 아무도 기억을 못 해.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 하지만 놀라운 성취인 건 분명하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굉장히 자랑스럽지."
리처즈는 이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재거와 견해를 같이하는 듯했다.
"친구, 난 세지 않아!" 그는 잡지 기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스톤즈는 50년을 1963년부터 계산한다고 생각해. 찰리가 1월에야 합류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2012년을 잉태의 해로 보고, 탄생은 그다음 해라고 보는 거지."
이디스 그로브 102호의 나날들
그해 여름 내내 밴드는 런던의 클럽들을 돌며 무대에 섰다. 부 디들리와 엘모어 제임스, 지미 리드, 그리고 물론 머디 워터스에 이르기까지 블루스 커버곡을 하나씩 쌓아갔다. 8월에는 재거, 리처즈, 존스가 첼시 이디스 그로브 102호 2층의 작은 플랫으로 함께 이사했다. 이곳은 밴드의 핵심 멤버들을 한층 단단히 묶어준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미안하지만—그 극심한 더러움으로도 유명해졌다. 욕실 없는 두 개의 방이 전부였고, 설거지되지 않은 그릇과 빈 맥주병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바닥 공간을 갈수록 좁게 만들었다.
"롤링 스톤즈는 태어난 첫해를 여기저기를 떠돌며 음식을 훔치고 연습하는 걸로 보냈지." 리처즈는 이렇게 회상했다.
바로 그 아파트에서, 몇 달 뒤 크로대디 클럽에서의 공연이 끝난 밤 믹은 비틀즈를 집에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냈고, 비틀즈 멤버들은 그 집이 얼마나 지저분했는지를 수년간 회화의 소재로 삼았다.
조금 뒤 그들은 찰리 왓츠까지 한집에 들이기 위해 더욱 비좁게 뒤엉켜 살았다. 그리고 모든 일은 확실히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