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세일럼 마녀재판에서 자백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벌어진 세일럼 마녀재판에서 마녀 혐의에 대한 자백을 거부하면, 재판이 진행된 시기와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자백한 사람 대부분은 목숨을 건졌지만, 결백을 주장한 이들에게는 오히려 더 가혹한 결과가 닥치곤 했습니다. 자백을 거부한 피고인들이 겪을 수 있었던 주요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1. 무기한 투옥

마녀 혐의를 끝까지 부인한 사람들은 무기한 구금될 수 있었습니다. 자백을 하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거나, 여론이 변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근대 초기 감옥의 환경은 극히 열악했습니다. 위생 상태가 나쁘고 음식이 부족했으며 좁은 감방에 많은 사람이 수용되어 질병이 만연했습니다. 실제로 재판 기간 동안 처형되지 않고도 감옥에서 사망한 피고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2. 고문과 강압

자백을 강제하기 위해 피고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고문과 강압에 시달렸습니다. 세일럼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방식은 '눌러 죽이기'였습니다. 피고인의 몸 위에 차례로 무거운 돌을 얹어 유죄 인정 또는 재판 출석을 강요하는 잔혹한 방법이었는데, 노인 길스 코리(Giles Corey)가 이 방식으로 목숨을 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끝까지 항변을 거부하다 며칠에 걸쳐 돌무더기 아래에서 짓눌려 사망했습니다.
그 외에도 수면 박탈, 구타, 그리고 '마녀 찔러보기'라 불리는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바늘을 피부에 찔러 통증을 느끼지 않는 부위, 즉 소위 '마녀의 표식'이 있는지 찾아내려는 수법으로,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미신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3. 추방

경우에 따라서는 결백을 주장한 사람들이 지역 사회 또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전체에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추방은 단순한 처벌을 넘어, 사회의 위협으로 간주되는 인물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추방령을 받은 사람들은 해당 지역을 영구히 떠나야 했고, 몰래 돌아올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나야 한다는 점에서 삶 자체를 빼앗기는 처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4. 교수형

자백을 거부한 피고인이 타인의 증언이나 '환영 증거(spectral evidence)'—피해자가 악령의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증거—를 통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처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세일럼 마녀재판에서 주된 처형 방법은 교수형이었습니다. 1692년 6월부터 9월 사이에만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이는 공개적으로 집행되어 정화 의식이자 다른 이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피고인이 극단적인 결과를 감수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증거가 불충분하여 석방되거나 기소 자체가 기각된 사례도 있었고, 재판 후반부에는 환영 증거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무죄 판결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혐의를 끝까지 부인한 사람일수록 장기간의 투옥, 고문, 추방, 그리고 최악의 경우 교수형이라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으로 '죄를 인정'한 사람이 살아남는 이 기괴한 구조는, 세일럼 마녀재판이 얼마나 부조리한 집단 히스테리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