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분할은 19세기에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대륙을 나눠 가진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며, 그 방침은 베를린 회의(1884~1885)를 통해 공식화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분할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산업혁명으로 급성장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독일 제국 등은 자국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와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진출에 나섰습니다.
포르투갈처럼 이미 16세기부터 아프리카에 발을 딛고 있던 나라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를 노예 노동력 공급지로 삼았고, 영국·스페인·프랑스·덴마크도 이 수익성 높은 무역에 동참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아프리카 팽창은 여론에서 "미개한 땅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인종과 문명 사이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만연했고,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와 사회 다윈주의 같은 이론들이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했습니다. 결국 유럽인들은 '낙후된' 아프리카인을 유럽식 틀에 맞춰 '문명화'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유럽에 전해진 아프리카 정보
아프리카 대륙에 관한 소식은 목적이 서로 다른 여러 탐험대의 보고서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 학술 탐사: 지형 측량, 지리적·식물학적 잠재력 조사, 대륙에 거주하던 다양한 민족 집단에 대한 기록
- 상업 탐사: 현지 원자재 파악 및 착취 가능성 평가
- 종교 탐사: 다신교와 식인 풍습을 없애고 기독교 전파
이렇듯 경제적 이익, 종교적 선교, 문화적 우월 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유럽 열강의 영토 욕구를 부채질했습니다. 유럽인 입장에서는 아프리카인을 '야만'과 '낙후', 구질구질한 풍습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명분이 필요했고, 이러한 제국주의적 태도는 '백인의 짐'이라는 신화와 우생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열강별 아프리카 점령 과정 요약
그동안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는 유럽 열강에 의해 점차 잠식당했습니다. 아래에서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점령한 과정을 나라별로 살펴보겠습니다.
포르투갈
브라질이 독립한 후에도 포르투갈은 앙골라, 카보베르데, 기니,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영토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넓히려던 벨기에, 영국, 독일과 충돌을 빚게 됩니다.
스페인
스페인은 카나리아 제도, 세우타, 서사하라, 멜리야를 점령했습니다. 카리브해 식민지에 공급할 노예는 포르투갈, 프랑스, 덴마크 상인들과의 거래에 의존했으며, 이후 1778년 적도 기니를 침략했습니다.
벨기에
벨기에의 레오폴 2세 국왕은 1876년 '아프리카 국제 협회'를 설립하고 콩고 지역을 탐사·점령하여 이 땅을 개인 재산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르완다를 점령해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인종 구분 체계를 도입했는데, 이 정책은 훗날 1994년 르완다 학살이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영국
산업혁명 덕분에 19세기 최대 경제 강국이 된 영국은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값싼 원자재를 필요로 했습니다. 영국은 오늘날의 나이지리아, 이집트, 남아공 등을 차지했고, 카이로와 케이프타운을 잇는 철도 건설 구상을 품을 만큼 자국의 우월성을 확신히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 케냐, 수단, 짐바브웨 등 두 거점 사이 지역을 침략했으며, 식민지를 지키고 넓히는 과정에서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와 충돌했습니다.
프랑스
프랑스는 1624년 세네갈을 점령해 카리브해 식민지로 향하는 노예 공급선을 확보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항해자들은 마다가스카르, 모리셔스, 코모로, 레위니옹 등 인도양의 여러 섬을 차지했습니다. 본격적인 팽창은 19세기에 이루어졌습니다. 1819년부터 1890년 사이에 아프리카 추장들과 무려 344건의 조약을 체결하며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차드, 말리, 토고, 베냉, 수단, 코트디부아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지부티, 부르키나파소, 니제르를 손에 넣었습니다. 프랑스는 침략에 저항하는 주민들과 싸우는 한편, 자국 영토를 노리는 독일과도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점령은 오늘날 가나에 해당하는 '네덜란드 황금 해안'에서 시작되었으며, 1871년 이 영토를 영국에 매각할 때까지 머물렀습니다. 민간 투자자들을 통해 1857년부터는 콩고 개발에도 나섰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남아공이었습니다. 1652년 현재의 케이프타운에 보급 기지를 세웠으나, 1805년 영국이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축출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남아공에 잔류한 네덜란드 계 주민(보어인)들은 영국과 수차례 충돌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보어 전쟁(1880~1881 / 1899~1902)입니다.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이탈리아는 세계 진출에 나섰지만 강력한 군사력이 부족해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일부, 리비아 정도만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정복에도 도전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에게 번번이 좌절했고, 에티오피아 정복은 1930년대 베니토 무솔리니의 지휘 아래에서야 이루어집니다.
독일
독일은 아프리카 시장에서 자신들의 몫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1870년 통일 이후 유럽의 어떤 결정도 강력한 비스마르크 수상을 거쳐야 했습니다. 유럽 열강 간 국경 분쟁이 극심해지자 비스마르크는 주요 식민 강국 대표들을 소집해 아프리카 점령의 방향을 논의하게 했고, 이 회의가 바로 베를린 회의입니다. 독일은 탄자니아, 나미비아, 카메룬에 해당하는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베를린 회의

아프리카 영토를 놓고 유럽 열강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은 아프리카에 영유권을 가진 유럽 국가 대표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프리카 대륙의 주인인 아프리카인 대표는 단 한 명도 초대되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회의(1884~1885)는 이미 점령된 영토의 국경을 승인하고, 향후 점령에 적용될 규칙을 마련하는 협정이었습니다. 주요 지침 중 하나는 어느 나라가 영토를 차지하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 이를 통보해야 하며, 해당 영토를 실질적으로 통치·관리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와 영향
아프리카 분할 이전의 아프리카 왕국들은 그 구성원인 민족 집단에 따라 자연스러운 경계 안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유럽 식민 지배자들은 자의적으로 국경을 그어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고, 그 결과 적대 관계에 있던 민족들이 하나의 영토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이어졌습니다.
유럽의 침략은 저항과 봉기를 불러일였지만, 이들 저항 세력은 20세기 들어 대량 학살당했습니다. 또한 유럽의 시각에서 비롯된 '아프리카인은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저주받았기에 번영할 수 없다'는 편견도 널리 퍼졌습니다.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이 되었으며, 석유, 금, 인광석, 다이아몬드 같은 천연자원에 대한 외부의 압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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