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신의 분노로 멸망한 아사쿠라 궁, 아사쿠라 다치바나 히로바미야의 전설

백강 전투를 다룬 글에서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그 전초 기지가 되었던 궁궐 아사쿠라 다치바나 히로바미야(朝倉橘広庭宮)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흔히 아사쿠라미야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전설이 얽힌 궁궐인 만큼,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사쿠라 다치바나 히로바미야의 위치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에는 다치바나노히로바 공원(橘広場公園)이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이 일대에 아사쿠라 궁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공원 안에서는 아사쿠라 궁과 관련된 석비와 신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석비 근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텐신노모리(天神の森)는 다치바나노히로바 공원 안에 위치한 숲으로, 사이메이 천황이 즉위한 장소라고 전해집니다. 또한 코노마루 공원 안에 있는 에소하치만구 신사(恵蘇八幡宮) 뒤편에는, 사이메이 천황이 붕어한 후 임시로 안장되었다는 전설이 담긴 두 개의 둥근 고분(円墳)이 남아 있습니다.

  • 에소하치만구는 아사쿠라 궁을 옮길 때 나라의 발전과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우사하치만구의 제신을 모셨습니다. 훗날 사이메이 천황과 덴지 천황, 두 분의 어신도 추가로 모셔졌습니다.
  • 다만 두 고분은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실제 사이메이 천황의 무덤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신사 경내 근처에 있던 키마루 궁(木丸宮)은 애도를 위해 지어진 궁이지만, 그 이름은 나무껍질이 붙은 통나무 기둥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자, 이제 본론입니다. 사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아사쿠라미야를 둘러싸고 이상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사이메이 천황 7년(661년)의 일입니다.

도읍을 옮기는 데 쓸 나무를 아사쿠라 신사에서 베어 왔기 때문에 신이 크게 노하여 천둥으로 궁을 무너뜨렸고, 심지어 궁 안에는 요화(鬼火, 도깨비불)까지 나타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많은 신하와 시종들이 병에 걸리거나 목숨을 잃었고, 끝내 사이메이 천황마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의 죽음의 원인은?

더욱 기이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원문은 가타카나 인용문 그대로라 읽기 어렵지만, 요지는 이렇습니다. 덴지 천황이 천황의 유해를 운반하던 날 저녁, 아사쿠라산 정상에서 칼을 든 귀신이 장례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이메이 천황의 죽음에는 '귀신'의 존재와 '타타리(祟り, 원령의 저주)' 같은 요소가 짙게 묻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사이메이 천황이 서거한 나이는 68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장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돌아가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왜 하필 죽음의 원인에 귀신과 저주가 등장하는 걸까요?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단순히 백강 전투의 패배를 암시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 천황들을 직접 언급하며 그들의 정통성을 강조해 온 일본서기가 굳이 그런 서술을 남겼다는 점은 다소 이색적입니다.

사이메이 천황과, 일본서기 편찬을 주도한 덴무 천황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중대형(中大兄, 훗날의 덴지 천황)과 해인황자(海人皇子, 훗날의 덴무 천황)라는 모자·형제 사이에 무슨 일이 없었을까요?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도 흥미로운 접근이 될 것입니다.

현재는 아사쿠라 궁이 후쿠오카에 있었다는 설이 우세하지만, 이요국(현 에히메현)의 이마바리에도 '아사쿠라'라는 지명이 있어 그 주변을 의심해 볼 만하다는 설도 있습니다. 파고들수록 궁금증이 커지는 주제인데, 이번 글에서는 우선 후쿠오카설에 초점을 맞추고, 언젠가 다른 설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덧붙여, 노가쿠 작품 '아야노츠즈미(綾の鼓)'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공연됩니다. 이 작품 역시 원한이 얽힌 이야기인데, 후세에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귀신, 저주, 원한 같은 소재는 시대를 넘어 여전히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