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의 난이란 무엇인가?
오늘 살펴볼 주제인 ‘임신(壬申)’은 672년, 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난 뒤 벌어진 일본 역사상 최초의 황위 계승 전쟁, 즉 임신의 난을 가리킵니다.
전쟁의 당사자는 덴지 천황의 동생 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 훗날 덴무 천황)와 덴지 천황의 아들 오오토모 황자(大友皇子)였습니다. 숙부와 조카가 황위를 두고 맞선 셈인데, 과연 이 내란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임신의 난의 원인
오랫동안 덴지 천황을 보필해 온 동생 오아마 황자와, 천황의 아들 오오토모 황자 사이에서 임신의 난이 벌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도화선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원래 덴지 천황은 자신을 오랫동안 도운 동생 오아마 황자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년에 마음을 바꿔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한 것이 내란의 발단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후계자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당시 권력자라고 해도 기대수명은 40대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유사시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어야 했는데(실제로 덴지 천황이 죽기 약 1년 전에는 규슈 지방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면 주변 사람들은 “너무 어려서 감당하기 어렵다”며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자식보다 형제가 뒤를 잇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오토모 황자가 매우 재능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화근이 되었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덴지 천황은 668년에 즉위한 뒤, 671년 정월 오오토모 황자를 태정대신으로 임명해 사실상 후계자 자리에 올렸습니다. 전례 없는 지위를 새로 만들어 아들에게 내준 것입니다.
* 참고: 오오토모 황자가 실제로 황태자였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는 설도 있습니다. 오아마 황자(=덴무 천황)를 천황의 동생으로 기록한 문헌, 즉 《일본서기》가 덴무 천황의 지휘 아래 편찬되었기 때문에 “덴무에게 유리하게 쓰여진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가능합니다. 다만 황태자였든 아니든, 그가 황위 계승에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천황을 보좌하는 자리에 아들이 앉게 된 사실을, 오아마 황자와 다른 호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아마도 “덴지 천황이 다음 천황으로 삼으려는 것은 오오토모구나”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덴지 천황(즉위 전 나카노 오에 황자)의 행적
645년, 나카노 오에 황자는 을사의 변을 일으켜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고, 그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의 자결로 몰아넣었습니다. 또한 이 쿠데타에 협조했던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노 마로가 죄 없이 자결로 내몰린 배후 인물로도 지목됩니다.
게다가 고토쿠 천황 사후에는 소씨 세력 부흥을 노리던 후루히토노 오에 황자를 모반죄로 몰아 공격해 죽였고, 아리마 왕을 교살한 것 역시 모반 혐의를 명분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눈에 거슬리는 인물은 차례차례 사라져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신의 난으로 가는 배경
덴지 천황마저 병들었습니다. 671년 9월 병상에 누운 천황은 오아마 황자를 불러 뒷일을 맡기려 했지만, 오아마 황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여겨 거절하고 요시노(奈良県 吉野)로 떠나 조용히 지냈습니다(아마 그 사이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뿌리내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오오토모 황자는 이미 고분 천황으로서 정치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궁이 근강·오미에 있었기 때문에 ‘근강 조정’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672년 6월, 오아마 황자가 마침내 거병하자 대호족들이 잇달아 그에게 호응했습니다.
* 고분 천황의 재위는 짧았고 즉위 의식을 치르지 않아 한동안 역대 천황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황으로 공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호족들은 왜 그토록 오아마 황자를 지지했을까요? 덴지 천황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까요? 싫어하는 인물을 차례로 제거해 왔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백강 전투(白村江の戦い)의 대패입니다. 전쟁에 이기면 얻는 것이 있지만, 패하면 불만만 남습니다. 장정을 동원하면 생산력이 줄어들고, 이기지 못하면 백성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합니다.
게다가 국방을 위해 성을 쌓고 도읍을 옮기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이 모든 일에 막대한 인력이 동원되면서 백성은 물론 호족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덴지 천황은 당시 천황이던 고토쿠 천황과 불화해 새 궁을 짓기도 했고, 백강 전투의 본거지로 궁을 건설한 데 이어 총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겼습니다.
강권(强權)으로 정치를 밀어붙인 덴지 천황의 그림자가, 그대로 아들 오오토모 황자에게까지 이어진 셈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임신의 난에서는 수많은 호족을 움직일 수 있었던 반군 측의 덴무 천황이 승리했고, 덴무 천황이 황위에 오르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다만 이상의 내용은 덴무 천황이 편찬을 지시한 《일본서기》의 기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편찬에 관여한 인물 중에는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있는데, 그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나카토미노 가마타리)의 아들로, 두 사람 모두 임신의 난과 다이카 개신에 깊이 연루된 인물입니다. 따라서 기록이 특정 방향으로 치우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보너스) 덴지 천황과 덴무 천황은 왜 사이가 나빴을까?
덴지 천황이 오아마 황자의 전처를 빼앗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 상대는 “아카네 물드는 무라사키 들판을 걷고, 시미즈 들판을 걷는데, 산을 지키는 사람이 보지 않았을까, 그대가 소매 흔드는 것을”이라는 노래를 남긴 누카타노 오키히메(額田王)입니다.
현대어로 풀면 대략 이런 뜻입니다. 나카노 오에 황자(훗날의 덴지 천황)가 누카타가 소매를 흔든 모습을 보고 놀렸다는, 은근한 경고 섞인 노래죠.
그러자 오아마 황자는 “무라사키(자초)처럼 그윽한 그대여, 만약 그대가 나를 미워한다 해도, 남의 아내이기 때문에 내가 그토록 사랑할 리 없잖은가”라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너무나 노골적인 이야기라 일종의 일화로 여겨지지만, 사실 여부를 단언할 수는 없는 부분이어서 궁금증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