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문벌 귀족 사회로 알려진 동진(東晉) 시대, 양하(陽夏) 사씨는 낭야 왕씨(琅琊王氏)에 필적할 만큼 강력한 가문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진(前秦)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을 때 승상으로서 나라를 지켜낸 사안(謝安), 그리고 당시 군을 직접 지휘한 사현(謝玄)의 업적은 특별히 조명할 가치가 있습니다.
양하 사씨의 기원
양하는 오늘날 허난성 일대의 지명입니다. 사씨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晉)나라에서 벼슬했던 인물에게 닿습니다. 낭야 왕씨와 달리 고대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명문은 아니었으며, 사씨가 권세를 쥐기 시작한 것은 동진 시대부터였습니다.
다른 많은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팔왕의 난 등의 혼란을 피해 사씨는 강남으로 이주했고 낭야 왕에게 중용되어 세력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왕돈(王敦)이 동진 찬탈의 뜻을 드러내자 이를 경계하여, 죽림칠현처럼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 은거 생활을 시작합니다.
실제로 왕돈이 거병하자 협력을 강요당하기도 했고, 이후 왕씨의 후원 아래 지위를 유지했지만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잃었고, 동진의 실권은 환온(桓溫)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 환온에게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 바로 사안입니다.
권신 환온과 맞선 사안
사안 역시 가문 사람들처럼 한동안 벼슬을 피하며 유흥과 자연을 즐겼습니다. 특히 낭야 왕씨의 일원인 왕희지(王羲之)와 친분이 깊어, 회계(會稽)에서 함께 산수를 거니며 풍류로운 나날을 보낸 도련이었습니다.
아내 유씨는 명제의 딸과 혼인한 유담(劉惔)의 누이로 알려져 있고, 사안의 질녀는 왕희지의 차남에게 시집갔습니다. 사안의 입지는 점차 높아져 갔습니다.
사안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40대를 넘긴 이후로, 계기는 남동생 사만(謝萬)의 실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환온 휘하에서 관직을 시작했는데, 이는 환온 쪽의 청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환온은 폭넓게 인재를 영입했으므로 일류 명사 사안을 중용한 것도 자연스럽고, 반대로 사안 입장에서도 환온의 행보를 살피기 위해 그 밑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안은 환온 밑에서 경력을 쌓았고, 환온 역시 권력을 확장해 이미 황제를 압도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동진 조정은 서부(西府)와 북부(北府)라 불리는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환온은 두 파벌 모두를 손아귀에 넣었고 마침내 제멋대로 부릴 수 있는 괴뢰 황제까지 옹립했습니다.
환온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황제에게 선양(禪讓)을 받아 새 왕조를 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대를 택한 인물이 있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이 바로 사안이었습니다.
사안은 다른 유력 인사들과 손잡고 환온과 정면 충돌했습니다. 환온은 분노하여 사안을 죽이려 했지만, 사안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했고 환온 앞에서 시를 읊었습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환온이 차마 죽이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야기가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일류 명사인 사안을 죽이는 일이 환온에게도 쉽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사안을 죽이는 순간 왕씨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이 적으로 돌아설 테니까요. 환온도 그만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환온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동진을 대표하는 실력자였고 영특한 인물이었지만, 수명을 포함해 결코 영웅의 그릇은 아니었습니다.
환온 사후 사안은 동진의 실권자가 되었고, 그의 통치 아래 동진은 다시 힘을 되찾습니다.
비수(淝水) 대전
세계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전투가 있지만, 그중 세계사 교과서에 오르는 전투는 100개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비수대전은 바로 그중 하나였으며, 규모 면에서는 세계사 최대급 전투였을지도 모릅니다.
동진이 내전 한가운데 있던 무렵,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에서 걸물이 태어납니다.
부견(苻堅)은 한족 출신 재상 왕맹(王猛)의 보좌 아래 전진을 거대 국가로 성장시켜 화북을 통일했고, 백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 침공에 나섭니다. 반면 동진군은 8만에 불과했고, 결코 강병이라 부를 수 없는 병력이었습니다.
이민족과 한족이 하나 되는 이상 아래 강대한 군단을 이끈 부견에게도 불안은 없지 않았습니다.
전진군은 오호(五胡)와 한족이 뒤섞인 혼성군으로 내부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안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전진 내부에 첩자를 심어두었고, 전진의 한족 장군들을 동진 편으로 돌리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부견은 이 전투에 앞서 형주 일대를 점령했는데, 그곳에서 항복한 한족 장군을 그대로 최전선에 배치했습니다. 왕맹이 살아 있었다면 없었을 일입니다. 하지만 왕맹은 이 전투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사안은 동생 사현에게 군을 맡기고 작전을 설계했습니다. 이 작전이 빛을 발해 전진군은 궤멸적으로 격파되었고, 동진은 멸망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전진 패배의 원인은 부견의 이상주의와 내부 분열이었습니다. 비수대전은 동진의 승리라기보다 전진의 자멸이라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승전 보고를 받은 사안은 마침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둑 상대가 돌아간 뒤 기쁨을 참지 못해 신나게 뛰어다니다 발을 부러뜨렸는데도 사안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비수대전의 공덕으로 양하 사씨는 큰 명성을 얻어 낭야 왕씨에 필적하는 가문으로 성장합니다.
그 후의 사씨
사안은 동진 황제에게 북벌을 건의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이유는 사씨의 추가 성장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비수대전 2년 후, 사안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66세였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387년, 이번에는 사현이 뒤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동진은 내전으로 쇠퇴하고, 손은(孫恩)의 난이 일어나면서 기반이 크게 흔들리다가, 마침내 새로운 영웅 유유(劉裕)에 의해 멸망합니다.
사안과 사현 이후 사씨에서 특출난 인물이 배출되지는 않았지만, 사씨는 동진 멸망 후에도 남조(南朝)의 귀족으로 존속했고, 남조 마지막 왕조인 진(陳)이 망할 때까지 마지막 후손이 혼란의 시대를 버텨냈습니다.
사씨의 역사야말로 곧 남조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안에 대한 평가
어떤 의미에서 사안은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꾼 인물입니다.
사안이 없었다면 동진은 훨씬 일찍 멸망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환온의 집안이 사마씨보다 나은 통치를 했을 수도 있고, 부견 아래 통일이 이루어지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안이 남긴 영향이 긍정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진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안이 사현과 함께 분명한 구국의 영웅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