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시대를 들여다보면 조정 내부와 유력 호족들 사이에서 갈등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 고대사 최대의 내분으로 꼽히는 임신의 난(壬申の乱)은 매우 유명한데, 호족 간의 항쟁과 황위 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은 이 시대에 중앙집권 국가를 탄생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혼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소가 씨의 내부는 어떠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는 유력 호족인 소가 씨(蘇我氏)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겠습니다.
소가 씨의 내분
을사의 변(乙巳の変) 당시 중대형왕자(中大兄皇子, 훗날의 덴지 천황)와 나카토미 가마타리(中臣鎌足) 편에 섰던 인물 가운데 소가 씨의 핏줄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가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노 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소가 씨 내부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와 그의 숙부, 즉 아버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동생인 사카이베노 마리세(境部摩理勢)는 스이코 천황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격렬히 대립했습니다.
에미시는 다무라 황자(田村皇子)를, 마리세는 야마시로노 오에 황자(山背大兄王)를 밀었습니다. 마리세의 배후에는 야마시로 황자의 이복동생이자 성덕태자의 아들인 하쓰세노 왕(泊瀬王)이 있었습니다.
에미시는 마리세를 설득해 소가 씨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소가 씨 묘역의 가건물(仮屋)을 파괴해버립니다. 하필 그 무렵 마리세의 후원자였던 하쓰세노 왕이 세상을 떠났는데, 마리세가 하쓰세노 왕을 숨겨 보호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가건물 파괴는 하쓰세노 왕 생전의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에미시는 병사를 일으켜 마리세에게 자결을 강요했습니다. 그 결과 에미시가 지원했던 다무라 황자가 즉위하여 조메이 천황(舒明天皇)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소가노 에미시의 소가 종가는 더욱 강대한 권력을 쥐게 되었지만, 다른 황족과 호족들의 반발 또한 한층 강해졌다고 여겨집니다.
소가 씨 내분의 원인
그렇다면 소가 씨는 왜 두 차례나 병사를 동원할 정도의 내분을 겪게 된 것일까요?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학설입니다. 나름 신빙성 있는 이야기이니 참고로 읽어주세요.)
그 답은 의외로 소가 씨의 출신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소가 씨는 사실 도래인(渡来人) 계통의 씨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황족과 호족들이 소가 씨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가 씨 내부에서 의견이 갈린다"는 소식을 접한 조정 세력이 각각 대립하는 인물의 배후로 붙어, 의도적으로 큰 혼란을 부추겼다는 것이 이 학설의 골자입니다.
실제로 사카이베노 마리세의 배후에는 하쓰세노 왕이,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노 마로의 배후에는 중대형왕자가 있었으므로, 이 학설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가 씨의 정확한 출신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만큼 틀렸다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중대형왕자가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노 마로를 이용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실제로 마로는 훗날 모함으로 인해 중대형왕자와 나카토미 가마타리에게 자결을 강요당했으며, 그들이 마로를 눈엣가시로 여겼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카토미 씨는 불교를 둘러싼 소가 씨와 모노노베 씨(物部氏)의 대립 과정에서 모노노베 씨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다소 찜찜한 마무리이지만... 어쨌든 소가 씨 같은 초유력 호족은 이 시대 어떤 가문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흙탕 싸움 속에 놓여 있었고, 여기에 황실과 얽힌 후계자 다툼까지 겹치면서 극한의 상황에 몰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고대인이라 해도 인간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훗날 일어난 임신의 난 역시 여인 문제가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데, 낮 드라마처럼 짙고 진해서 나름 재미있긴 한데, 정작 주변 사람들은 잘 공감해주지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