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대공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며 전쟁이 끝난 지 어언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전후 재건의 기반이 된 일본국 헌법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위대의 지위 규정, 미일 동맹의 안보 문제 등 일본의 전후 체제에 관한 논의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전후 세대 중 하나입니다.

직접적인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미래의 전쟁을 생각할 때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부터 종전까지의 흐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쟁까지의 흐름

전후 세대인 우리가 지난 전쟁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이 어떻게 전쟁으로 치달았는지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전쟁을 경험하고 그 실상을 증언할 수 있는 세대는 해마다 고령화되며 줄어들고 있습니다. 영상과 사료만으로는 전할 수 없는 생존 증언이 사라지면, '왜 전쟁을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의식 자체가 옅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료와 증언, 기록을 통해 같은 역사를 배울 수는 있습니다. 먼저 전쟁의 도화선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대전쟁을 불러온 대공황

세계대전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있습니다. 두 전쟁의 연결고리를 살펴보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이해해 보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인류 최초의 세계규모 전쟁입니다. 독일·오스트리아 등 4개 동맹국과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 27개 연합국 간의 전투 끝에 연합국이 승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를 위한 노력을 목표로 미국이 주창한 국제연맹이 출범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국제 평화기구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국제연맹 아래 군축과 국제 협력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공황이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공황이란 뉴욕 증권거래소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경제 공황입니다. 당시부터 뉴욕은 세계 경제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그 영향은 순식간에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대공황에 대한 각국의 대응

각국은 다음과 같은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 미국 ⇒ 뉴딜 정책으로 경제와 노동의 붕괴를 막고자 함
  • 영국 ⇒ 식민지 및 협력국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블록 경제 발동
  • 독일 ⇒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배상금과 대공황이 겹치면서 혼란이 극심해지고, 폭력과 민족 차별을 내건 히틀러의 나치당이 부상
  • 프랑스 ⇒ 관련 국가들과의 협력 심화
  • 이탈리아 ⇒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대외 침략 노선 강화
  • 일본 ⇒ 쇼와 공황과 대공황의 이중 타격으로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그 해결책으로 중국에 대한 통제 확대 정책 추구

각국의 정책을 살펴보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듯한 긴장감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합니다.

만주사변

이러한 긴장 속에서 1931년 류차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이 발생합니다.

류차오후 사건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 주장한, 일본이 자행한 자작극이었습니다.

일본은 중국 침략의 명분으로 이 사건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본격화했습니다. 당시에는 국지적 충돌에 불과해 국가 간 전쟁으로 보기 어려웠지만, 1937년 7월 7일의 마적교 사건(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중일전쟁으로 확대됩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과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외적과 내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일본에 맞설 여력이 없던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임시로 손을 잡고 싸우기로 합의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국공합작입니다.

1932년, 관동군은 국가의 형식을 갖춘 '만주국'을 세워 침략이 아닌 기정사실화를 꾀했지만, 괴뢰국가임이 분명해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중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이 침공에 맞서 연합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됩니다.

1940년에는 이탈리아가 독일 편에 참전하며 전황이 더욱 확대됩니다.

1941년에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동아시아의 일본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일미 개전의 열쇠, 진주만 공습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시작될 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1941년 12월 8일의 진주만 공습입니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날이므로 정확한 날짜를 기억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시험에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이 날짜가 중요한 이유는 국제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1907년 헤이그 협약에 따르면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반드시 선전포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선전포고에 앞서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이 행위는 국제법 위반으로 각국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일본이 미국·영국과의 개전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시간으로 12월 8일 새벽, 영국령 말레이반도에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고, 같은 날 새벽에는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이 감행되었습니다. 헤이그 협약에 따라 사전 통지를 하려면 이보다 앞서야 했지만, 일본이 선전포고 각서를 미국 측에 전달한 것은 12월 8일 오전 4시 20분이었습니다.

겨우 몇 시간의 차이였지만, 공격과 선전포고의 순서가 뒤바뀐 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운명을 가르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독일·이탈리아 vs 미국·영국·프랑스 연합국의 구도가 완성됩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태평양 전쟁 개전까지의 흐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회복의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 공황, 대공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낳았던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각국의 동향을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