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헤이안시대 전기~중기에 발생한 사건 및 개인정보

헤이안 시대에 일어난 많은 사건이나 인물이 있고, 앞으로도 그 수가 더 늘어날 것 같아서 연표를 만들었습니다.

각 시대를 알기 쉽게 링크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작성한 내용대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링크 수를 늘릴 예정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중기까지의 사건

황제 관련 중요 인물 관련 이벤트
칸무 천황

(재위 781 – 806)

■ 사와라왕자 - 785년

[간무 천황의 ​​형] (⇒ 후에 간무 천황으로 개명)

■ 후지와라 요시츠구 / 모모카와 [시키케]

(간무 천황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 후지와라노 나가테 [키타이에]

■ 헤이안쿄로 이전

■ 도호쿠 헤이세이

■ 간무 천황의 ​​정치 개혁

■ 군단 폐지

■ 아내와 자녀가 많음

⇒후손은 다이라 칸무 씨입니다

헤이제이 천황

[간무 천황의 ​​아들]

(재위 806 – 809)

■ 후지와라노 구스코 [시키케] -810년

■ 후지와라노 나카나리 [시키케] 〃

■ 사가 황제로 이적

쿠스코 사건(810)

(=히라조 다이라 천황의 변화)

헤이제이 천황의 총애를 받았던 후지와라노 구스코와 그 오빠 후지와라 나카나리는 헤이제이 천황의 진지함을 겨냥해 소란을 일으켰다.

(*그 외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구스코 사건 / 배경>

<인간관계에서 검색>

⇒ 후지와라 키타 가문의 성장

<관세정치의 시작>

⇒구로도코로 및 케비이시 대리점 설립

<구스코 사건이 조정에 미친 영향>

그 후에는 양조업자가 된다 =구성은 황제의 보좌관과 같을 것이다.

[사가 천황 시대]

■ 그의 남동생 오토모 친왕(=준나 천황)이 황태자의 남동생이 된다

조와 사건

의 먼 원인에

■ 준나황제에게 이관됨

사가 황제

[간무 천황의 ​​아들]

(재위 809 – 823)

■ 후지와라노 후유츠구 [키타이에]
준나 황제

[사가 천황의 남동생]

(재위 823 – 833)

■ 후지와라노 후유츠구 [키타이에] -872

■ 후지와라 요시후사 [키타이에]

■ 후지와라 요시후사가 양조장에 취임
닌묘 천황

[사가 천황의 아들]

(재위 833 – 850)

■ 후지와라 요시후사 [키타이에]

그의 아내는 사가 천황의 딸인 미나모토노 기요히메입니다.

전직 공주였던 그녀에게는 아내가 한 명뿐이고 자녀도 거의 없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요시후사의 형인 나가라로부터 모토츠네를 양자로 삼고 그 뒤를 이었다.

조와 사건(842)

후지와라씨에 의한 타인의 추방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준나 천황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츠네사다 황자가 폐위된다.

게다가 반씨와 다치바나씨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다.

⇒ 황태자 도야스 친왕(훗날 몬토쿠 천황)

■ 요시후사의 여동생 준코는 닌미 천황의 공주로 도야스왕을 낳습니다.

몬토쿠 천황

[닌미 황제의 아들]

(재위 850-858)

■ 요시후사의 딸 아키코와 함께 왕자(훗날 세이와 천황)를 획득하세요.
세이와 천황

[몬토쿠 천황의 아들]

(재위 858 – 876)

■ 후지와라 요시후사 [키타이에] -872

■ 후지와라노 모토츠네 [키타이에]

■ 할아버지가 요시후사를 때렸기 때문에 생후 8개월에 왕세자가 되셨다.

■ 9세에 즉위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가신으로서 첫 섭정에 취임

<관세정치의 시작>

■ 요시후사의 동생 나가라의 딸 타카코를 세이와 천황의 부인에게 보냄

또한 타카코는 9살이나 많았고,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전 황족인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와 연애 관계를 가졌다는 점도 지적되었습니다.

■ 요시후사는 겐푸쿠 이후에도 대성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계속해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 세이와 천황에게는 많은 아내와 자녀가 있습니다

타카코 외에도 모토츠네의 딸들이 많이 파견됐고, 타카코의 세이와 천황의 딸인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조카 후미코가 모토츠네와 타카코의 내면을 더욱 악화시켰다.

⇒많은 후손들이 가신에 속해 세이와 겐지가 되었습니다

요제이 천황

[세이와 천황의 아들]

(재위 876 – 884)

■ 후지와라노 모토츠네 [키타이에] ■ 전임자에 이어 모토쓰네가 섭정이 됨

■ 겐푸쿠 복장을 한 때부터 기행이 심해졌고, 유모의 아들을 살해한 죄로 모토쓰네가 그를 폐지하라고 종용하여 코우코 천황에게 넘겨졌습니다.

코우코 천황

[닌미 황제의 아들]

(884-887 통치)

■ 모토츠네의 지원으로 55세에 왕위에 오름

그의 인품과 높은 통찰력을 기대했다고 한다.

■ 실제로 Mototsune의 첫 번째 Kampaku 사례가 공개되었습니다.

우다 천황

[고코 천황의 아들]

(재위 887 – 897)

■ 후지와라노 모토츠네 [키타이에] -891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아코의 갈등(887)

간파쿠에게 모토츠네 역을 맡길 예정이었으나, 그런 취지로 쓰여진 '아코'라는 단어가 중국에서 위장 직업 역할을 거부한 사건은 '지위가 높아 일을 하지 않는다'.

⇒중개자로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다 천황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

다이고 천황

[우다 천황의 아들]

(재위 897 – 930)

■ 후지와라노 도키헤이 [키타이에] 마사야스노헨(901)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강등되었습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조사하기 위한 그의 파트 2>

↑ 우다 천황과 미치자네의 모습을 그린 『우다 천황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어떤 인물인가?』를 먼저 보시면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스자쿠 천황

[다이고 천황의 아들]

(통치)

다이라노 마사카도 란 발생합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격동의 배경을 살펴보자>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연관성 조사>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란 발생합니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왜 일어났는가? >

(=둘을 합쳐서 성평/천교노란이라고 합니다)

그는 초기 천황에게 많은 가신을 내려놓았지만, 겐지와 타이라 외에 아리와라와 타카시나도 있다. 출신을 정정하면 다치바나 씨도 황족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