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도쿠가와 막부와 도자마 다이묘의 관계: 견제와 공존의 에도 시대

막번 체제의 확립과 다이묘 통제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를 거쳐 막부의 기반이 마련되었고, 오사카 진(大坂の陣) 이후 도쿠가와 씨는 본격적인 막번(幕藩) 체제를 시작했습니다. 각지의 다이묘는 일정한 지배 권한을 유지하는 대신 도쿠가와 가문의 신하로 복속했으며, 막부는 이를 통해 전국을 직접·간접적으로 통치해 나갔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검지(検地)와 사신(四民) 신분제 등 사회 질서 재편 정책을 통해 농촌을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높이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분 이동은 극도로 억제되었습니다. 아울러 참근교대(参勤交代) 제도로 다이묘들이 에도에 머물 것을 의무화하고, 에도성·나고야성 등 직할 성곽의 축성과 보수 부담을 지움으로써 각 번의 재정을 소모시켜 다이묘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도 노렸습니다.

또한 막부는 특히 세키가하라 이후에야 복속한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를 중심으로 개역(改易, 영지 몰수), 전봉(転封, 영지 이동), 감봉(減封, 영지 삭감)의 형식으로 세력 약화를 추진했습니다.

다이묘의 분류와 처분 현황

다이묘는 도자마 다이묘, 친번(親藩) 다이묘, 보명(譜代) 다이묘의 세 유형으로 나뉘며, 1만 석부터 100만 석에 이르는 약 300명의 다이묘이 막부의 통치 아래 각기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개역과 감봉은 도자마 다이묘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에도 시대 전체를 통틀어 도자마 다이묘 127가문, 친번·보명 다이묘 121가문이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는 보명 다이묘보다 오히려 친번 다이묘 쪽이 더 많이 처분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막부 입장에서 혈족인 친번 역시 중요한 통치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처분 사유 대부분은 후계 분쟁이나 후사 없는 가문의 단절 같은 내부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강대한 도자마 다이묘들은 에도에서 먼 지방에 배치된 반면, 에도와 주요 도시 주변에는 보명 다이묘를 배치해 방어선을 굳혔습니다. 실제로 간토와 도카이 지방은 도쿠가와 씨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에도를 공략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더욱이 막부의 요직은 보명 다이묘과 하타모토가 독점했는데,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암살당한 노중 수좌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역시 보명 다이묘인 이이 가문 출신입니다.

도쿠가와 정권 아래 도자마 다이묘의 위치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에게 복속한 다이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초창기부터 도쿠가와를 따랐던 보명 다이묘나 도쿠가와 일문인 친번 다이묘와 달리, 막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막부 체제 안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만 가문의 성격 면에서 도자마 다이묘에게는 국주(国持)급 다이묘, 즉 넓은 영지를 지닌 대다이묘이 많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이묘의 구분은 친번·도자마·보명이라는 분류 외에도, 국주(国主)·준국주(準国主)·성주(城主)·무성(無城)이라는 격(格)에 따른 서열도 존재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막부 정치에 참여한 것은 주로 보명·친번 다이묘였으므로, 막부를 지탱하고 운영하는 역할이 소수 가문에 집중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도자마 다이묘들 사이에서 불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가 백만석 마에다 가문의 예외적 대우

이처럼 도자마 다이묘가 냉대받은 듯 보이지만 예외도 있었습니다. 바로 가가의 마에다(前田), 사쓰마의 시마즈(島津), 센다이의 다테(伊達), 조슈의 모리(毛利)입니다. 이들은 국주급 다이묘로서 도쿠가와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어 인척 관계를 깊게 했고, 도쿠가와 가문의 본성(本姓)인 '마쓰다이라(松平)' 성을 하사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 가가 번의 마에다 가문입니다. 마쓰다이라 성과 함께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인 아오이(葵) 문장까지 하사받았을 뿐 아니라, 가문의 격도 고산케(御三家)에 필적하는 것으로 여겨져 '준친번(準親藩)'으로 대우받았습니다. 심지어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이 반포된 상황에서도 한 번에 두 개의 성을 인정받는 등 파격적인 예우를 누렸다고 전해집니다.

마에다 가문으로 유명한 인물은 도요토미 정권 아래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었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입니다. 당시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하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도쿠가와가 천하를 차지한 뒤에는 가장 먼저 주목받았어야 할 가문이지만, 가가 번 2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前田利常)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과 혼인하여 도쿠가와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마쓰다이라 성을 하사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마에다 가문 역시 에도 초기의 개역·감봉 물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마에다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의 혼인을 거듭하며 새 정권 아래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가가 번의 가신 중에는 다이묘급 대우를 받는 마에다 일문 가신도 배출되었고, 가나자와의 인구는 에도·교토·오사카에 이어 10만 명을 넘어서며 독특한 가가 백만석 문화가 꽃피웠다고 합니다.

가가 백만석의 경제 규모는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4조 엔에서 10조 엔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3년 이시카와현의 세수가 약 1,377억 엔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다만 당시 가가 번 영지에는 도야마 지방이 포함되어 있어 단순 비교는 어렵습니다.

이렇듯 가가 백만석의 다이묘조차 수많은 위기를 넘기며 도쿠가와 정권 아래 확고한 지위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도자마 다이묘들은 에도 시대 내내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그 속에서 묵묵히 버티며 살아남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