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의 재정은 도쿠가와 이에츠나 시대부터 시작된 문치 정치(文治政治)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쌀값 하락에 대한 뚜렷한 대책 없이 방치되면서 위기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뒤를 이어, 기이 번 출신의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8대 쇼군으로 임명됩니다.
요시무네는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인 기이 도쿠가와 가문의 영주로, 기이 번 시절 이미 번정 개혁에 착수해 행정 체계를 간소화하고 철저한 검약을 통해 재정 재건에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덕분에 막부에서 빌린 차관 10만 석까지 갚아냈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약 20억~30억 엔에 달하는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시무네에게 주어진 쇼군으로서의 과제는 바로 막부 재정의 재건이었습니다. 기이 번주 시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곧바로 막부 개혁에 착수했고, 이것이 바로 교호 개혁(享保改革)입니다.
교호 개혁은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 미즈노 타다쿠니의 덴포 개혁과 함께 에도 시대의 삼대 개혁으로 꼽힙니다. 세 개혁의 배경과 내용은 시험에 자주 출제되므로 함께 정리해 두면 좋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
막부 수입의 원천은 농민에게 거두는 연공미(年貢米)였습니다. 그러나 쌀은 현금으로 환전되었기 때문에 쌀값의 등락에 따라 실질 수입이 크게 흔들렸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막부와 무사 계급의 재정은 늘 빠듯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시무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합니다.
막부 권력 확립과 도시 개혁
인사 개혁에 있어서 요시무네는 아라이 하쿠세키와 마나베 아키후사를 파면하고, 기이 번의 가신들을 막신(幕臣)으로 대거 기용하여 자신의 개혁 기반을 다졌습니다.
도시 정책에서는 남정봉행(南町奉行) 오오카 타다스케(大岡忠相)를 중용했습니다. 역사 드라마 ‘오오카 에치젠’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그 사람입니다.
오오카 타다스케는 화재가 잦았던 에도의 방화 대책에 착수하여 정화조직(町火消, 마치비케시)을 창설했습니다. 이것이 근대 소방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소화 방식은 불이 나면 주변 건물을 허물어 연소를 막는 파괴 소방법이 일반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소방 기술이 발전하여 손펌프와 같은 소방 도구도 발명되었습니다.
또한 에도 근교에서 농업 정책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곡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신전(新田) 개발을 적극 추진했고, 용수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치수 사업도 펼쳤습니다. 아울러 기근 대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작물에 대한 연구를 명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당시 재판의 표준이 된 공사가타 사다메가키(公事方御定書)를 제정했습니다. 상·하 2권으로 구성된 이 막부 법전은 과거 판례 등을 정리한 것으로, 늘어나는 소송 처리의 신속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아시다카(足高) 제도
이 시대 막부에서 높은 직위에 오르려면 일정 수준의 신분, 즉 석고(石高)가 필요했습니다.
요시무네는 신분이 낮아도 유능한 인재가 있음을 알고, 이런 인재에게 쌀을 지급해 석고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리고 그에 걸맞은 직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퇴임하면 쌀 지급을 중단하여 원래 수준으로 되돌렸습니다. 이를 통해 막부 재정에 가는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인재를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목안함(目安箱) 설치
어느 시대든 서민의 의견과 소망이 쇼군의 귀에 닿기란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시무네는 서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목안함을 설치했습니다.
이 목안함 덕분에 가난한 백성도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정화조직 창설의 계기가 된 것도 이 목안함이었다고 합니다.
오오쿠 개혁과 검약
요시무네 이전의 쇼군과 막신들은 막부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치에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요시무네는 재정 재건을 위해 무엇보다 검약이 우선이라고 판단합니다.
막신들에게 아무리 검약을 호소해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시무네는 먼저 자신이 모범을 보이며 가신들에게 검약을 요구했습니다. 쇼군이면서도 비단 대신 면 옷을 입고, 하루 두 끼만 먹는 생활을 했으며, 식사도 일주삼채(一汁三菜)처럼 지극히 소박했습니다.
요시무네는 검약에 그치지 않고 오오쿠 개혁에도 손을 뻗칩니다. 실제 오오쿠를 유지하는 비용은 막부 재정의 약 25%를 차지했다고 하며, 그 대부분은 여인들의 의복 등에 쓰였습니다.
오오쿠 개혁의 핵심은 대규모 감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감원은 고령자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부터 하기 마련인데, 요시무네는 정반대로 진행했습니다. 오오쿠의 여인들 중 외모가 뛰어난 25세 이하의 젊은 여성들을 감원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감원 후 요시무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모가 좋다면 오오쿠를 나간 뒤에도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날 것이다.” 다시 말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오오쿠를 떠나도 반드시 좋은 인연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기에 그는 ‘천하의 명군’이라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재정 안정화 대책
재정 재건의 기본은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리는 것입니다. 교호 개혁에 이 논리를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신전 개발을 통해 막부의 수입을 확대했습니다.
또한 각 다이묘에게는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의무를 완화하는 조건으로 1만 석당 100석씩 쌀을 막부에 헌상하게 하는 아게마이(上げ米)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연공 징수 방식도 개혁했습니다. 수확량에 따라 연공을 정하는 검견법(検見法)에서, 수확량과 관계없이 일정한 연공을 거두는 정면법(定免法)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막부의 수입은 안정되었습니다.
연공 수입이 아무리 늘어도 쌀값이 떨어지면 무의미합니다. 이에 요시무네는 도지마 쌀 시장(堂島米市場)을 공식 인가하여 쌀값을 올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여기서 정거래와 장부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간단히 말해 정거래는 현물 거래이고, 장부 거래는 선물 거래입니다. 증거금을 쌓아두면 차액 결제 방식으로 선물 거래가 가능했으며, 도지마 쌀 시장은 세계 최초로 잘 발달된 선물 거래 시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교호 개혁의 결과
에도 시대 삼대 개혁 중 하나인 교호 개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됩니다.
- 쌀과 화폐 수입이 늘어나 막부 재정이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
- 막부의 정치 체계가 정비되고 제도가 개선되었다
반면 연공율이 높아지면서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잇키(一揆)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또한 신전 개발로 쌀 생산량이 늘자 쌀값이 폭락하여 민생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결국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은 막부 재정을 일시적으로 재건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후 다누마 오키츠구의 시대를 거쳐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과 미즈노 타다쿠니의 덴포 개혁으로 그 맥이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