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메이지 문명개화가 바꾼 일본인의 생활 방식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일본의 정권은 에도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정부로 이양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곧바로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이 문화적 변화를 문명개화(文明開化)라고 부릅니다.

일본의 근대화와 문명개화

에도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정부가 출범하면서 일본인의 생활은 서구적 의식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크게 전환되었습니다. 이른바 문명개화란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수용하려던 운동을 가리키며, 그 결과 일본의 사회 제도는 놀랄 만큼 빠르게 근대화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의 일본은 쇄국 정책을 채택해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평등사상의 유입을 차단하고, 에도 시대를 상징하는 신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막부의 의도된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쇄국과 신분제 유지라는 선택은 일본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사회를 발전시킬 기회를 박탈했고, 그 결과 일본은 세계 각국의 발전 흐름에서 뒤처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일본의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서구 열강의 제도와 기술, 문화를 폭넓게 도입하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매우 활발했고, 그때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던 구습과 풍습을 비꼬는 유행가들이 잇달아 탄생했습니다. 당시 문명개화의 분위기는 이런 노래 속에서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스키야키를 먹는 습관도 이 무렵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명개화로 인해 일본인의 생활 방식은 급격히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양력이 사용되었고, 양복 역시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전까지는 기모노로 대표되는 일본식 의복(和服)이 보편적이었지만, 점차 양복을 입는 사람이 늘어나며 기모노를 입는 사람은 줄어들었습니다.

스키야기를 비롯한 다양한 서양 음식도 유입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일본에는 동물의 고기를 먹는 풍습이 거의 없었으나, 소고기를 포함한 육류 섭취가 점차 일상화되었습니다.

건축 양식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벽돌 건물과 가스등이 거리에 등장했고, 1872년에는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横浜) 사이에 철도가 개통하는 등 눈에 띄는 근대화의 상징들이 하나둘 세워졌습니다. 아울러 근대적 학제, 우편 제도, 경찰과 군대 등 수많은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문명개화가 남긴 영향

문명개화의 가장 큰 영향은 에도 시대 사회를 지탱해 온 신분 제도에서 벗어나 평등주의로 이행했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입니다.

다만 이 사상을 실제 사회 제도에 반영하는 과정에서는 뒷면도 있었습니다. 훗날 시행된 징병제는 '국민 모두가 군인이 된다'는 평등 개념을 활용한 것이었는데, 이는 종전에 없던 파격적인 발상으로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 평등이 만인을 위한 이념으로 내세워졌음에도 현실 사회에는 불평등한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은 자유민권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국가의 여러 사안을 민주주의에 입각한 의회의 논의로 결정하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의 자유민권운동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민주주의가 사회 운동을 통해 확산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신문·잡지 기고에 대한 엄중한 탄압도 병행되었습니다.

이처럼 문명개화는 대정봉환 이후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서구를 본보기로 삼으며, 이후의 일본을 근본적으로 바꿀 중대한 문화적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정치적 변화였다면 문명개화는 문화적 변화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변화 모두 그 이후 일본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