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는 귀족 사회가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10세기 중반,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등의 전란이 잇달아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무력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세력이 등장하자 헤이안의 귀족들은 크게 불안해졌습니다. 조정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귀족들은 무사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했습니다. 조정과 귀족이 감당하지 못하던 무력 진압을 무사들이 담당하게 되면서, 무사의 정치적 존재감은 점차 커져갔습니다.
무사(사무라이)란 무엇인가
당시 조정은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는 무사들도 있었지만 지방의 강대한 무사들과 맞설 만큼의 힘은 없었습니다. 결국 귀족 사회의 질서를 지켜 주는 무사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사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한 지방 호족과 유력 농민
- 조정의 무관으로서 무예 하나만으로 중앙 귀족에게 인정받은 유력 가문
두 대 무가 세력, 다이라와 미나모토
이러한 무사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것이 다이라(平氏)와 미나모토(源氏)입니다.
다이라 씨 … 간무 천황의 후손
미나모토 씨 … 세이와 천황의 후손
두 세력은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동국(東國)과 중앙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무가의 정점에 선 것이 바로 다이라 씨였습니다.
다이라 씨의 도약
누구나 알다시피 헤이케(平家)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은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입니다. 「헤이케에 아니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을 정도로 헤이케는 눈부시게 번영했습니다. 다이라 씨가 어떻게 도약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기요모리의 아버지 다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는 기요모리 이전에 세토 내해를 비롯한 서국 해역을 장악하며 헤이케의 기반을 닦은 인물입니다. 세토 내해에서 약탈을 일삼던 해적들을 토벌하며 조정으로부터 압도적인 신뢰를 얻었습니다.
해적은 세토 내해에서 약탈을 반복하던 무장 집단으로, 조세를 실고 운송하던 고쿠시(国司)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조세를 강탈당하는 것은 조정에게 큰 골칫거리였지만, 해적 소탕의 전문가였던 타다모리가 이를 진압하면서 조정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송 무역(日宋貿易)이라 하면 기요모리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은 아버지 타다모리였습니다. 이 일송 무역을 통해 다이라 씨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송나라 화폐가 국내에 유통되어 경제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타다모리는 조정의 허락을 받아 송과 무역을 하며 도바 상황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1153년 타다모리가 세상을 떠납니다…
호겐의 난 발생
타다모리가 죽은 직후인 1156년, 그와 친했던 도바 상황마저 붕어합니다. 무가인 다이라와 미나모토는 권력 다툼에 깊이 휘말리게 되었고, 무가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됩니다.
당시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은 인세이(院政)를 펼치던 상황이었습니다. 도바 상황의 사후, 후계자로 스토쿠 상황을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고시라카와 천황을 내세울 것인가를 둘러싸고 호겐의 난이 벌어집니다.
두 천황(상황) 세력의 대립 속에서 다이라와 미나모토 역시 서로 적대하게 됩니다. 즉 호겐의 난은 단순한 다이라와 미나모토의 싸움이 아니라, 각자가 섬길 주군을 결정짓는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는 고시라카와 천황 측이 승리합니다. 그 결과 기요모리는 승전에 크게 공헌하여 상황의 측근인 후지와라노 미치노리(信西)와의 거리를 좁히게 되고, 상황과 귀족들의 신임을 얻으며 권세를 키워갔습니다.
이 일련의 분쟁으로 인세이는 혼란에 빠졌고, 천황과 상황의 대립에 무사들이 개입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헤이지의 난 발생
호겐의 난에서 무사 측의 승자로 남은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였습니다. 다이라 씨의 당주는 기요모리, 미나모토 씨의 당주는 요시토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이지의 난에서 드디어 다이라와 미나모토가 무가의 정점을 걸고 격돌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호겐의 난 이후 기요모리는 미치노리와 더욱 친밀해졌지만, 후지와라노 노부요리(信頼)는 기요모리의 권세가 나날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노부요리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손잡고 기요모리를 토벌하기 위해 병사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1159년의 헤이지의 난입니다.
이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후지와라노 미치노리의 권력 다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호겐의 난에서 함께 싸웠던 기요모리와 요시토모가 맞붙는 대결이었습니다.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는 서로 손잡고 승리하여 조정에서의 권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기요모리는 이 싸움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노부요리·요시토모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이것이 무사가 권력을 쥐는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헤이지의 난을 승리로 이끈 기요모리
두 차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그 기세를 몰아 헤이케의 번영을 계속 쌓아갑니다. 고시라카와 상황과의 관계를 깊게 하여 중앙 정치에서 발언권을 키웠고, 그 영향력은 관직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1167년, 무인으로서는 최초로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랐습니다. 태정대신은 율령제의 최고위 관직입니다. 즉, 무사인 기요모리가 중앙 정치의 최고 자리에 임명된 것입니다. 귀족이라도 극소수만 오를 수 있는 자리에 무사가 오른 것은 역사적인 업적이었습니다.
헤이케는 아버지 타다모리 대부터 이어진 일송 무역을 한층 더 확대하여 더 큰 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또한 딸 도쿠코(德子)를 다카쿠라 천황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천황가와 인척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고, 훗날 도쿠코가 안토쿠 천황을 낳으면서 외척의 지위까지 얻게 됩니다.
이렇게 부와 권력을 모두 쥔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헤이케 일문의 수장이었지만, 그 권세의 거대함과 전횡이 결합되어 반감을 품는 세력이 늘어갑니다. 반감은 점차 커져가고, 드디어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으로 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