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겐의 난(保元の乱) 이후 무사 세력이 정치 무대에 크게 부상했습니다. 당시 무가(武家)의 양대 세력은 다이라(平氏)와 미나모토(源氏)로,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냈고, 그가 이끄는 다이라씨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기요모리는 스스로를 몰락으로 이끄는 운명적 실수를 저지르는데, 바로 미나모토씨의 적장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처형하지 않은 것입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훗날 다이라씨 멸망의 주역이 되었으니, 이 판단이 얼마나 치명적인 선택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되짚어보면서,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최대 실패로 꼽히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리 과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호겐의 난 이후 정국은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니조 천황파와 고시라카와 상황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고시라카와 상황의 측근으로서 권력을 강화해가던 후지와라노 미치노리(신세이)를 경계하는 세력이 양 진영 모두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정세는 점점 더 복잡하고 불안정해집니다.
마침내 반(反)신세이파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쿠데타를 계획했고, 여기에 요리토모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도 가담합니다. 요시토모는 동국(간토)을 근거지로 삼는 무사로서, 노부요리와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바로 헤이지 원년(1160년)의 헤이지의 난입니다.
교토에 부재 중이던 기요모리는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지만, 점차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며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격파합니다.
기요모리에게 패한 요시토모는 동국으로 도주하던 도중 아이들과 헤어지게 되었고, 결국 체포되어 처형당합니다. 아버지와 갈라선 요리토모 역시 추격병에게 붙잡혀 기요모리 앞에 끌려갑니다.
패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러나 기요모리의 계모인 이케노젠니는 당시 13세였던 소년 요리토모를 보고는 목숨만은 구해달라고 탄원합니다.
구명을 탄원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요리토모가 일찍 요절한 자신의 아들 이에모리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기요모리는 이케노젠니의 탄원을 받아들여 요리토모를 이즈국 히루가코지마로 유배보냈습니다.
참고로 이케노젠니는 기요모리의 계모일 뿐만 아니라, 호겐의 난 당시 스토쿠 상황의 황자 시게히토 친왕의 유모이기도 했으며, 기요모리가 고시라카와 상황 측에 서야 한다고 조언한 공신이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훌륭한 일화지만, 역사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이후 이즈에서 성장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미나모토씨 재건의 기수가 되어 다이라 타도(打倒平氏)의 깃발을 들고 거병합니다. 결국 겐페이 전쟁에서 그는 기요모리가 이끌던 다이라씨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배운 기요모리의 실패!?
이 역사적 실패담은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을 즐겨 읽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훌륭한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지낼 때부터 책벌레였던 이에야스는 다이라와 미나모토의 흥망성쇠를 그린 『아즈마카가미』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기요모리와 요리토모의 이야기 역시 그 안에 담겨 있었지요.
이에야스는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은혜 덕분에 천하를 손에 넣었지만, 그럼에도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히데요리가 살아남으면 장차 반드시 도쿠가와 가문의 위협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하를 통일한 뒤, 마지막 대업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기요모리는 계모의 탄원을 받아들이다가 다이라씨 멸망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반면 이에야스는 이 실패를 거울삼아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렇게 에도 막부 260년의 역사를 열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