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르며, 이 시기 대륙에서 벼농사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야요이 시대 이전에도 벼농사가 행해졌다는 학설도 존재합니다.
벼농사 문화는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가능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결속력 있는 집단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공동체를 '쿠니(国)'라고 불렀습니다.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
쿠니가 형성되기 시작하자 마을 간 격차가 벌어지고, 쿠니 사이에는 충돌이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쿠니의 맹주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야마타이국(邪馬台国)'입니다.
중국의 역사서 『위지 왜인전(魏志倭人傳)』에는 야요이 시대 말기인 서기 239년, 당시 중국 위(魏)나라에 일본의 왜국(倭国), 즉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왜지전에 따르면 당시 왜국에는 마쓰로국, 나노국, 이토국, 후미국, 도마국 등 무려 30여 개의 나라가 있었으며, 그 중심에 야마타이국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야마타이국은 집 수가 약 7만 호에 달했으며, 일반 주거지만 해도 7km²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제단, 정무를 보던 관청, 창고, 지배층의 거처 등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국 전체 규모는 10km²를 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적 조사 결과 한 호당 약 10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7만 호라면 인구는 약 70만 명에 이릅니다. 다른 쿠니가 약 1,000호였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야마타이국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큰 나라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전체 인구가 약 2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 야마타이국에 속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야마타이국의 위치는 어디일까?
그렇다면 야마타이국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을까요? 수많은 학자들이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두고 활발히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왜지전에는 야마타이국까지의 여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된 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끝이 태평양 한가운데에 닿게 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기술된 순서에 따라 거리를 보정하면서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야마타이국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나라의 기록에 의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지만, 현재 유력하게 거론되는 설은 '기나이설(畿内説)'과 '규슈설(九州説)' 두 가지입니다.
기나이설에서는 나라현 사쿠라이시의 마키무쿠 유적 등이 유력한 후보지로 꼽힙니다.
규슈설에서는 북부 규슈와 다자이후 일대가 후보로 거론됩니다.
두 설 모두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나이설과 규슈설 모두 왜지전에서 비롯된 이론이지만, 왜지전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요즘은 기나이설이 우세한 분위기입니다.
그 이유는 마키무쿠 유적 내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조사한 결과, 히미코가 사망한 시기와 일치하여 이곳이 히미코의 능묘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꾸준한 연구와 분석 기술의 발전과 함께, 앞으로 야마타이국의 위치도 조금씩 밝혀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왜지전에 기록된 야마타이국
당시 중국은 위(魏)·촉(蜀)·오(吳)가 패권을 다투는 삼국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편찬된 중국 사서에 따르면,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은 서기 57년, '영초(永初) 원년'은 서기 107년, 그리고 '환령(桓靈)'은 일반적으로 147~188년을 가리킵니다. 이 무렵 왜국의 왕 '수승(帥昇)'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왜국이 크게 어지럽고 서로 치고받으며 오랫동안 주군이 없었다"는 기술로 미루어 왜국이 서로 싸우고 있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아직 일본 전체를 통괄하는 왕은 없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왜지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마타이국이라 불리는 곳에 여왕이 있었으며, 본래 이 야마타이국에는 왕이 있었으나 이후 30개국 위에 군림하는 여왕 히미코를 세워 귀도(鬼道)로써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위의 사료들을 종합해 보면, 히미코가 야마타이국의 여왕이 된 이후 대란이 가라앉고 일본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히미코 시대에 야마타이국은 외교에 나섰습니다. 상대는 삼국시대의 나라 중 하나인 위(魏)였습니다.
이 외교 노선 덕분에 239년 위의 황제는 히미코에게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함께 금인(金印), 그리고 동경(銅鏡) 약 100면을 하사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대륙 최강의 세력이었던 위로부터 받은 이 칭호를 통해 히미코는 대내외적으로 '왜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귀도(鬼道)로써…'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귀도는 히미코가 정치에 활용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종의 점복(占卜)으로 여겨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히미코의 즉위로 왜국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지만, 오래가지 못해 다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격렬했던 전투는 야마타이국 남쪽에 위치한 '구누국(狗奴國)'과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히미코는 이 전쟁 중이던 248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히미코 사후 한때 남자가 왕으로 세워졌지만, 끊이지 않는 혼란 끝에 다시 여왕(토요, 臺與)이 옹립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야마타이국은 3세기 중반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413년까지 약 150년 동안 중국 사서에는 왜국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의 4세기를 '공백의 세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야마타이국과 야마토 왕권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합니다.
*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