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메이지 초기의 국제 문제 — 불평등조약 개정에서 정한론·사쓰마의 난까지

불평등조약 개정, 메이지 정부의 최대 외교 과제

메이지 정부에게 가장 중요한 외교 과제는 에도 막부 말기부터 이어져 온 불평등조약의 개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871년(메이지 4년)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절(正使)로, 기도 다카요시 · 오쿠보 도시미치 · 이토 히로부미 등을 부절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 각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약 개정 교섭은 결렬로 끝났지만, 사절단은 서구 열강의 근대적 정치와 산업을 상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 이 경험은 귀국 후 일본의 근대화 추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끈질긴 교섭을 계속하여 1876년에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관세 자주권 회복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유럽 열강들이 반대하면서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일본의 아시아 확장

같은 시기 메이지 정부는 아시아 각국에도 개국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1871년 청나라와 중일 수호조규(日清修好条規)를 체결했는데, 이는 일본이 외국과 처음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조약이었습니다.

한편 류큐 왕국을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1872년 류큐번(琉球藩)을 설치하고 류큐 왕 쇼타이(尚泰)를 번왕으로 삼았습니다. 이 조치에 반대한 청나라는 강력히 항의하며 이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류큐 사람들이 대만 원주민에게 살해되는 사건(팔요선 사건)이 발생합니다.

청나라가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태 처리는 극도로 어려워졌고, 이에 군인과 사무라이들이 강경론을 주창하자 정부는 1874년 대만에 출병했습니다. 이 사태에 대해 청나라는 영국의 중재 등을 계기로 일본군 파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이어 1879년에는 류큐 처분으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습니다.

그 결과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토지 제도 · 조세 제도 · 지방 제도 등에는 구래의 관습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 중의원 선거가 처음 실시된 것은 1912년 다이쇼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본토와의 경제 격차가 커 현민의 소득은 낮았고, 출향 노동과 해외 이민 등으로 인구가 줄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부가 처음부터 개국 협상을 진행해 온 조선은 당시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고, 일본의 교섭 태도도 달가워하지 않아 협상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무력으로라도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며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절단에 합류했던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먼저 귀국하여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정한론을 내세운 사이고 등은 정계에서 물러나(下野)게 됩니다.

한일 관계는 1875년 강화도 사건(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전 통고 없이 강화도 인근 해역을 측량하던 일본 선박이 조선군의 포격을 받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강화도를 점거했습니다. 이는 마치 한때 페리가 일본에 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되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당했던 방식을 조선에 적용해 개국과 불평등조약(강화도 조약, 1876) 체결을 강요했으며, 이는 청나라와의 중일 수호조규 체결과 같은 궤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무력 시위 방식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정부는 러시아와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1875)을 체결하여 사할린(가라후토)에서의 모든 권리를 러시아에 양도하는 대신 쿠릴 열도 전체를 일본령으로 넘겨받았습니다. 다음 해에는 미국으로부터 이즈·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를 인정받아 영토를 확정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의 항쟁, 사쓰마의 난

정한론을 주장하며 물러난 참의들은 무력 항쟁을 주장하는 세력과 언론·여론으로 싸우는 세력으로 갈라졌습니다. 어느 쪽이든 반정부 세력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정부는 이에 대비해 내무성과 경찰 제도를 설치했습니다.

언론과 여론의 길을 택한 쪽에서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남은 무력파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에토 신페이였습니다. 그는 고향 사가현에서 사족을 이끌고 반란(사가의 난, 1874)을 일으켰으나 두 달 만에 진압되고 처형되었습니다.

사족 특권 박탈의 마지막 단계가 된 것은 폐도령(廃刀令, 1876)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족들은 구마모토의 신연(神風連)의 난을 비롯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농민들 역시 지세(地租) 부담에 시달리며 큰 불만을 안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가고시마 사족과 사립학교(私学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최대 규모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정부는 보신 전쟁 이후 최대의 내전이 된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약 반년을 들였습니다. 이 사쓰마의 난(西南戦争, 1877)에서 신정부군의 힘이 입증된 이후, 사무라이에 의한 반란은 마침내 종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