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은 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청나라와 일본이 정면으로 격돌한 전쟁입니다.
한반도는 동아시아 외교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청나라)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일본은 이곳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일본에는 대륙으로 진출해 이익을 얻으려는 공격적 동기 외에도, 러시아가 남하할 경우 일본 본토 밖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방어적 동기(일본 열도를 전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에게 조선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을 의미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들의 영향권에 두었던 조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공세적 동기와, 조선이 일본 손에 넘어가면 그곳에서부터 자국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라는 방어적 동기 때문에 청나라 역시 조선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양국 모두 나름의 명분과 이해관계가 형성되면서 일본과 청나라는 충돌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청일전쟁의 발발
청일전쟁은 조선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인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군과 청군이 조선에 파병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이 진정된 후에도 양국 군대는 모두 철수하지 않았고, 특히 청나라는 추가 병력을 조선으로 보내려 했습니다. 증원군이 도착하면 곤란해지는 일본군은 아산 근해에서 청나라 함대를 기습 공격했는데, 이것이 전쟁의 서막을 연 풍도 해전입니다.
이 해전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청나라는 1,00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일본군과 청군은 성환에서 교전했는데, 이곳에서도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국은 정식 선전포고를 하며 본격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합니다.
청나라와의 본격 전쟁
본격 전쟁 돌입 후 전투의 규모는 더욱 커졌지만, 전쟁의 주도권은 계속 일본 쪽에 있었습니다. 육군은 평양 전투에서, 해군은 압록강 하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조선 내 청나라군은 전선 유지가 어려워져 조선에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압록강 해전에서의 청나라 패배는 이 전쟁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청나라 해군의 주력인 북양함대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청나라는 제해권을 상실했고,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청나라 본토로 진격하여 구연성(九連城) 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어 요동반도의 요충지인 뤼순(旅順)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요동반도와 산둥반도에서 청나라군은 사기와 장비 면에서 열세에 놓였고, 총공세에 나선 일본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연패를 거듭했습니다.
압록강 해전에서 패배한 북양함대의 잔존 세력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머물며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웨이하이웨이마저 함락되면서 청나라 방어의 핵심이던 북양함대는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북양함대의 침몰로 바다를 완전히 장악한 일본군은 타이완 점령을 준비하기 위해 펑후 제도를 확보하고, 타이완 전역 점령까지 노리게 되었습니다.
연이은 패배와 북양함대 소멸로 전력이 크게 약화된 청나라는 일본에 강화를 제의합니다. 일본군은 연승을 거듭했지만 청나라 전역을 점령할 역량은 없었기에, 이 강화 제의에 응하면서 청일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시모노세키 조약과 삼국 간섭
이 강화가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입니다. 청나라는 타이완, 요동반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것은 물론, 배상금 2억 냥(타일)*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 거액의 배상금은 국민을 위해 쓰인 경우가 드물었고, 대부분 군비 확장 경쟁에 사용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 조선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하게 됩니다.
*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억 엔 이상으로,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두 배가 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요동반도 할양 조항에 대해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삼국 간섭에 나서면서 해당 할양은 무산되었지만, 그 외에는 일본의 요구가 거의 모두 관철된 강화였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배상금과 해외 영토인 타이완을 손에 넣으며 제국으로 가는 길에 올라섭니다.
이 삼국 간섭, 특히 러시아에 대한 강한 반감은 이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