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히데요시의 '주고쿠 대되돌림'으로 벌어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필두 가로인 시바타 가쓰이에를 꺾으면서, 불과 1년여 만에 오다 가문의 뒤를 잇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 모리 데루모토와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 다른 다이묘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노부나가를 잃은 오다 가문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려 했을까요? 아니면 이미 그럴 역량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걸까요?
오늘은 혼노지의 변 직후 일본의 정세를 각 다이묘 가문의 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혼노지의 변 이후 각 다이묘 가문의 상황
오다 가문의 세력은 하시바 가문과 시바타 가문으로 분열되어 서로 다투고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슈·신슈 지방에서 호조 가문과 대치하며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모리 가문이 하시바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이 시바타 가문과 맞설 여력이 충분해 보였는데, 과연 실제 상황은 어땠을까요?
또한 시코쿠에서는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앞장서 시코쿠 통일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 직후 그곳의 다이묘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을까요?
모리 가문은 오다 가문의 공세에 지쳐 있었다…
혼노지의 변 직후, 모리 가문은 오다 가문과의 항쟁으로 인해 이미 극도로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병농분리(兵農分離)를 완성하지 못한 모리 가문은 언제든 전쟁에 짓밟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오다 가문은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공세를 이어갔고, 그 결과 강화 직후의 모리 가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게다가 히데요시의 회유책에 부응해 오다 측으로 돌아서는 세력들도 많았습니다.
그러하기에 빗추 다카마쓰 성에서의 강화 교섭이 원만하게 성사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리 가문 내부의 회의에서도 주전파였던 기카와 모토하루는 오다 군 추격을 주장한 반면, 온건파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이미 강화 조약이 체결된 이상 정세를 지켜보자며 추격에 반대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훗날 도요토미 정권의 오대로(五大老)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름을 올린 점을 보면, 배후에 어떤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도 짚어볼 수 있습니다.
우에스기 가문은 신발타 가문의 반란으로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우에스기 가문에게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신발타 가문이 일으킨 내분 진압이었습니다.
신발타 가문은 원래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이었습니다. 1579년 시바타 나가아쓰가 병사하자 동생인 시게쓰나가 가문을 계승했지만, 오다테의 난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포상을 받지 못했다는 불만을 품고 가게카쓰에 대한 반역을 계획합니다.
먼저 그는 당시 에추까지 진출해 있던 오다 가문과 손을 잡았습니다.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가 시나노 방면을 거쳐 에치고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시게쓰나는 이에 호응하여 기바 성을 침공합니다. 그동안 중립을 유지하던 아이즈의 아시나 가문마저 노부나가에게 종속하게 되면서,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에치고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고 만니다. 에치고로 진군하던 오다 군은 일제히 교토와 각자의 영지로 철수했습니다.
그 결과 오다 가문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신발타 가문을 향해, 가게카쓰는 병력을 돌립니다. 당시 우에스기 가문에게는 노부나가 타도보다 에치고 통일이 훨씬 더 시급한 과제였던 것입니다.
호조 가문은 오다 가문의 압박이 크지 않았다
혼노지의 변 이후 저항 의지를 보였던 유일한 세력은 호조 가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다 가문의 직접적인 압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덕분에, 호조 가문은 관동에서 적을 공격해 몰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각 다이묘 가문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호조 가문… 도쿠가와 가문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 모리 가문… 오다 가문과의 전투에서 이미 싸울 의욕을 잃었다.
- 우에스기 가문… 내분 때문에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 조소카베 가문… 시코쿠 평정에는 오다 가문이 발목을 잡지 않았다.
- 도쿠가와 가문… 등 뒤에 호조가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시 각 다이묘 역시 천하통일을 누구나 바라는 목표로 삼고 있었지만, 그 첫걸음은 우선 눈앞의 적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오다 가문을 격파하고 판도를 뒤집을 기회가 왔다 해도, 병농분리를 완성하지 못한 다이묘들에게 이 1년간의 공백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세를 지켜본 뒤 때가 성숙해졌을 때 움직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겠지요.
결국 히데요시는 정세를 관망하던 그 1년 사이에 오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고, 오다 가문의 무장들을 성공적으로 포섭하여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기를 확정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노지의 변 직후 일본의 실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