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태평양 전쟁에서 '불굴의 병사'로 유명한 후나사카 히로시 씨를 소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가 배치되었던 곳에서 벌어진 전투가 어떤 전투였는지, 왜 그런 전투가 일어났는지 먼저 이해하는 것이 인물의 생애를 파악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앙가우르 섬 전투를 살펴보고자 한다.
앙가우르 섬 전투는 태평양 전쟁 중 벌어진 전투 중 하나로, 1944년 9월 17일부터 10월 19일까지 팔라우 제도를 구성하는 섬 중 하나인 앙가우르 섬에서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앙가우르 섬 전투의 배경
일본의 '절대국방권' 구상
애초에 일본은 본토 방위와 전쟁 지속에 필수적이라고 여긴 지역을 '절대국방권'이라고 불렀다. 치시마(쿠릴 열도), 남양 제도(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동남아시아 제도, 그리고 미얀마를 잇는 선을 방어해야 한다는 구상이 세워진 것이다.
절대국방권이 확정될 당시 해군의 주전장은 태평양이었고, 육군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로 나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구상은 육군이 그리던 그림과 매우 유사해서, 육군에 가까운 인사들이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해군의 사정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 아닐까? 실제로 이 구상은 해상 보급선 방어 능력을 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군은 절대국방권과 무관하게 방어선 바깥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 보급선 방어가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육군이 더 현실적인 구상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두 조직 간에 정보 공유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이격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본토 방어에 필요한 방어선은 분명히 존재했으므로, 스스로의 역량 부족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방어선이 아니라 '점'이 된 섬들
개념적으로는 '선'을 그렸을지 몰라도, 해상 보급선 방어 능력을 초과하는 이상 수많은 섬이 고립되어 보급선이 끊긴 '점'이 될 위험이 있었다. 이 점을 지적한 사람도 여럿 있었고, 결국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실제 전황을 보면,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고 같은 해 8월 괌이 함락되면서 미군은 필리핀 공략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필리핀이 함락되면 북쪽의 타이완으로, 타이완이 무너지면 오키나와로, 최종적으로는 일본 본토까지 닿을 규모의 진격이었다. 사이판도 항공기가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위치라 빼앗기면 곤란했겠지만, 오키나와가 넘어간다면 상황은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 미군 측도 내부적으로 다소 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해상 보급선 차단 계획, 타이완→오키나와→본토 진격 계획, 타이완을 기지화한 뒤 폭격기로 본토에 항복을 강요하는 계획 등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위 서술은 어디까지나 한 가지 예시이다.
일본은 자원 확보를 위해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필리핀이 상실되면 자원 수송이 극도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은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던 셈이다.
펠렐리우 섬과 앙가우르 섬
필리핀 공략 단계에서 펠렐리우 섬에는 요충지 비행장이 있었다. 펠렐리우 섬은 팔라우 제도를 구성하는 주요 섬 중 하나로, 후나사카 히로시 씨가 있던 앙가우르 섬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지도를 보면 팔라우 제도가 필리핀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미군은 이 펠렐리우 섬을 공략하려 했지만, 일본군이 게릴라전 등으로 철저한 항전 태세를 보이면서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인근 섬들을 확실히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앙가우르 섬 역시 비행장 건설이 가능한 섬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다른 부대가 펠렐리우 섬 상륙 이틀 후 비행장 건설을 목표로 앙가우르 섬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
팔라우의 중심인 펠렐리우 섬은 이미 전장이 되었고, 태평양의 다른 섬들도 함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앙가우르 섬 전투는 보급이나 증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가운데 시작되었다.
앙가우르 섬 전투의 경과
압도적인 전력 차
일본군은 앙가우르 섬에 약 1,250명 규모의 보병 연대를 배치한 반면, 미군은 포병 대대 4개와 전차 대대 1개를 포함한 제81보병사단 약 21,000명을 투입했다. 참고로 사단은 2개 이상의 연대로 구성되고, 연대는 여러 개의 대대 또는 중대로 이루어진다.
무기와 병력 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고, 일본군은 작전 수행 능력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일본군 측 제59연대는 앙가우르 섬 방어뿐만 아니라 '팔라우 방위'를 맡은 제14사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펠렐리우 섬 방어에도 상당한 병력을 배분해야 했다.
상륙 작전과 초전
여기에 미군 측은 펠렐리우 섬과 앙가우르 섬 주변 섬들을 제압하기 위해 항모 기동부대까지 파견했다. 즉, 바다에서의 함포 사격과 하늘에서의 폭격을 모두 받는 처지였다. 미군 도착 전에 공병대가 만들어 놓은 상륙 저지용 장애물들은 공습과 함포 사격으로 대부분 무력화되었다. 장애물과 지뢰가 미군에 일부 피해를 입혔다고는 하나, 상륙에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고립된 수비대의 최후
미군의 공격으로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통신 수단의 상실이었다. 일본군은 다른 팔라우 지역 부대와 연락할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졌다.
많은 병사가 이미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무력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병사들은 재편성하여 야간 공격에 나섰다. 한때 미군을 해안까지 밀어내기도 했지만, 날이 밝자 전차와 폭격의 반격을 받아 이때 투입된 일본군 부대는 궤멸당했다.
남은 수비대는 장기 저항을 각오하고 섬의 동굴 속에서 버텼다. 그리고 10월 19일,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궤멸되었다고 전해진다.
양측의 피해
- 일본군: 전사 약 1,191명, 포로 59명
- 미군: 전사 260명, 부상 2,294명
이오지마·오키나와로 이어진 전술
격전지라고 하면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의 이미지가 강하고, 펠렐리우 섬과 앙가우르 섬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팔라우 방어에서 수행된 상륙 저지 작전에서 철저한 지구전으로 전환하는 전략은, 이후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로 계승되었다고 평가된다. 압도적인 전력 차 속에서도 시간을 끌어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했던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 방어 전술의 원형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