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는 어떻게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할 수 있었을까요? 앞서 이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는 소수의 오다 군이 오케하자마에 진을 치고 쉬고 있던 이마가와 군을 산 뒤편에서 기습하여 승리했다고 서술했습니다.
두 사료에 담긴 오케하자마 전투의 상반된 해석
오케하자마 전투를 연구하는 데 핵심이 되는 사료는 『신초코키(信長公記)』와 『보안본 노부나가기』입니다.
보안본 노부나가기는 에도 시대에 간행된 것으로, 『신초코키』를 바탕으로 저자 자신의 독자적인 고찰과 해석을 덧붙인 책입니다. 노부나가의 공식 기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케하자마 전투에 대한 묘사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듯한 묘사 속에도 몇 가지 중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바로 기습을 감행했다고 알려진 '산 중턱'에 관한 부분입니다.
『신초코키』에는 노부나가가 젠쇼지 성채에서 나카지마 성채로 이동한 뒤, 언덕 위에 진을 친 이마가와 군을 산 중턱에서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보안본 노부나가기에는 나카지마 성채를 거치지 않고 젠쇼지 성채에서 곧장 이마가와 본진 뒤편 산으로 돌아가, 이마가와 군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산 중턱에서의 공격]과 [산 뒤편에서의 공격]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원전인 『신초코키』는 에도 시대에 널리 간행되지 않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쓰인 『보안본 노부나가기』는 일반 대중에게 출간되어 많은 에도 시민들이 읽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보안본의 묘사가 민간에 널리 퍼졌고, 그것이 통설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정면 돌파였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육군 참모본부가 『일본전사(日本戰史)』 편찬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중 『오케하자마 전투』를 편찬할 당시, "노부나가는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우회로를 통해 요시모토의 본대에 접근한 뒤 산꼭대기에서 기습을 감행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군사 전문가인 육군 참모본부가 이 학설을 채택하면서 [우회 기습설]은 통설이 되었고, 수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우회 기습설은 오랫동안 통설로 군림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학설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역사 연구가 후지모토 마사유키가 1980년경부터 주장해 온 [정면 공격설]입니다.
후지모토는 창작 요소가 짙은 『보안본 노부나가기』보다는 『신초코키』가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노부나가의 공식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노부나가는 우회하지 않고 이마가와 군을 정면으로 공격했다"는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오케하자마에 본영을 설치한 요시모토는 북서쪽 방향으로 진영을 구축했습니다.
나카지마 성채를 떠난 노부나가 군이 산 중턱*으로 행군하던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돌과 표범을 퍼붓듯 한 폭우는 노부나가 군의 등 뒤에서 쏟아져 이마가와 군을 강타했습니다. *여기서 산 중턱은 요시모토가 본영을 둔 오케하자마야마와 나카지마 성채 사이 지점으로 설명됩니다.
나카지마 성채는 평지이고, 오케하자마는 구릉지대입니다.
평지와 구릉이 맞닿는 지점을 산 중턱이라고 가정하면, 이마가와 군의 선봉대가 바로 이 산 중턱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부나가는 폭우가 그치고 하늘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산 중턱에 진을 친 이마가와 군 선봉대를 공격합니다. 소수의 노부나가 군이 정면에서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이마가와 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노부나가 군의 맹공으로 선봉대가 무너졌고, 그 여파는 뒤쪽에 위치한 요시모토 본진까지 번져 전군이 궤멸했으며, 결국 대장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후지모토가 주장하는 [정면 돌파설]입니다.
물론 이 학설에도 의문점은 남아 있습니다.
『신초코키』에는 이마가와 군 선봉대를 공격했다는 기술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매복해 있었다 해도, 이마가와 군이 노부나가 군의 공격에 그렇게 쉽게 무너질 정도로 약했을까라는 의문도 남습니다.
이에 대해 오와리(57만 석)를 다스린 오다 씨가 실제로는 2천 명이 아니라 약 1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회 기습설]과 [정면 돌파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국 시대 최고의 명전으로 꼽히는 오케하자마 전투가 이후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