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노예 해방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국시대에는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의 재산이 약탈당했고, 저항하면 살해되었으며, 살아남더라도 노예로 팔려나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노예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도였지만, 일본에서도 수백 년 전까지는 매우 보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아시가루(足輕)는 전장에서 싸워도 영지를 받지 못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군인 무사에게 신분을 받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렇기에 아시가루들의 약탈과 난행은 묵인되었고, 그들은 적의 마을에서 금품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팔아넘기며 개인적인 이익을 챙겼습니다.

전국 다이묘들도 노예를 사고팔았다

노예 거래는 아시가루뿐만 아니라 이름난 전국 무장들도 저지른 행위였습니다.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信濃)의 시가 성(志賀城)을 공격했을 때는 적병을 모두 베었고, 남은 사람들은 가나야마(金山)에서 광부로 부리거나 첩으로 팔아넘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전국 다이묘들은 공격한 땅을 자신의 영지로 다스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점령지 백성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앞선 시가 성의 사례는 강한 경고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예외적인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반면 우에스기 겐신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거의 매년 간토 지방을 공격하던 겐신은 승리해도 그 땅을 영지로 삼지 않고 에치고(越後)로 급히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간토 원정은 영지 확보가 목적이 아니라 농한기를 활용한 경제 대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모쓰케(下野)의 오다 성(小田城)을 공격할 때는 겐신이 직접 노예 매매 시장을 열도록 명령했고, 사람들이 20~32문(文)에 사고팔렸다고 합니다. 현재 가치로 1문이 약 30엔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노예 한 명이 약 600~900엔에 팔린 셈입니다.

이 시세는 매우 낮은 것이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노예 가격은 2관문(2000문)에 달했으니 무려 100배의 차이입니다. 팔려나간 노예가 너무 많아 수급의 균형이 깨져 가격이 폭락한 것으로 보이며, 팔리지 못한 사람들은 현장에서 풀려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본 전역에서 노예 매매가 성행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국시대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 통일 과정에서 법으로 노예제를 금지하면서 이 풍습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국 무장으로서 지배하려는 땅의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천하 통일을 꿈꾸던 히데요시에게는 일본 전체가 장차 자신의 영지이므로 그 백성을 아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예수회와 노예상

히데요시가 규슈를 통일하던 시기, 그는 선교사들이 노예를 사들여 팔다리를 사슬로 묶고 짐처럼 배 밑창에 쌓아 올리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히데요시는 즉시 선교사들에게 이를 금지하라고 명했고, 동시에 그 조치로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노예의 해외 판매 금지는 물론 국내 매매까지 강력하게 금지함으로써, 일본은 인신매매를 금지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과거에 팔려나간 일본인들을 데려와 줄 것을 요구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노예를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필요하다면 대금을 지불하겠다고까지 제안하며 일본인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 매매에 가담한 선교사들은 예수회 소속이었다고도 전해집니다. 한편으로는 노예상들에게 파문 명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과 기독교 금지는 단순한 종교 탄압이 아니라, 노예 무역이라는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을 이루고 지배 영역 전역에 인신매매 금지를 선포함으로써, 노예 매매가 없는 세계 최초의 국가를 만들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