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혼노지의 변을 알고도 히데요시를 추격하지 않은 모리 씨, 그 숨겨진 이유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 모리 씨가 지배하던 주고쿠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 있었습니다. 전투가 한창이던 중, 비젠 다카마쓰 성에서 시미즈 무네하루가 지키는 성을 수공(水攻)으로 공략하는 '다카마쓰 성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582년(덴쇼 10년), 바로 그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납니다.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동료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 씨와 강화를 맺고, 다카마쓰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확인한 뒤, 미쓰히데에 대한 복수를 위해 히메지로 군을 돌렸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철저히 숨겼습니다. 후원자를 잃었다는 사실이 모리 씨에게 알려지면 추격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리 씨가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철수한 다음 날이라고 전해집니다.

혼노지의 변부터 야마자키 전투까지의 흐름

혼노지의 변 발생부터 야마자키 전투까지를 연대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월 2일 : 혼노지의 변 발생
6월 3일 : 히데요시 군, 아케치 측이 모리에게 보낸 사자를 붙잡아 혼노지의 변 소식을 입수
6월 4일 : 안코쿠지 에케이의 중재로 모리 씨와 강화 성립
6월 5일 : 다카마쓰 성의 시미즈 무네하루 할복
6월 6일 : 히데요시 군 철수 개시
6월 7일 : 모리 측, 기이 사이카 잇키를 통해 노부나가의 죽음을 인지
6월 13일 : 야마자키 전투

모리 씨는 히데요시가 철수한 다음 날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았으므로, 즉시 추격했다면 히데요시 군을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추격하지 않았고, 13일에 야마자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모리 씨는 왜 추격을 단념했을까요?

그곳에는 훗날 도요토미 정권의 요직에 올 만큼 정치적 교섭 능력이 뛰어났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모리 모토나리의 유언

모리 가문의 기본 전략은 선대 당주 모리 모토나리의 유언에 담겨 있었습니다. 즉, 천하 통일을 노리고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영토 방위'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키국의 호족 출신인 모리 씨는 오랫동안 믿음직한 중신 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설령 120만 석의 대영주가 되었다 해도 탄탄한 지배 구조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모토나리는 아들들을 기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에 양자로 보내, 모리·기카와·고바야카와 삼극 체제로 당시 영토를 지키는 방향으로 통치했습니다. 기카와 가문의 양자가 된 추격파 기카와 모토하루를 설득한 것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였다고 전해집니다.

「모리는 결코 천하를 노리지 않고, 신의(信義)로 나라를 다스린다」

이것이 모토나리의 유언이며, 다카카게는 이 유언에 근거해 히데요시를 추격해서는 안 된다고 모토하루 이후의 추격파를 설득했습니다.

또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시점은 다카마쓰 성 수공이 진행 중이던 때로, 강화 교섭은 이미 최종 단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한번 맺은 강화를 어기는 것은 모리 씨다운 처세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주고쿠 원정은 이미 빗추국까지 진출해 모리 영토의 절반 이상을 평정한 상태였고, 가문의 존망이 위태로운 국면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은 오다 군이 더 이상 모리를 공격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며, 철수하는 히데요시 군을 추격할 명분도 없고, 오히려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진전시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실제로 비젠·미마사카·호키 세 국을 공양한다는 조건으로 강화가 맺어졌지만, 분할 협의 끝에 최종적으로는 미마사카만을 넘기고, 빗추와 호키는 일부 지역만 할양하는 등 모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타결되었습니다.

모리 씨의 추격을 피한 히데요시는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천하 통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591년 전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과정에서 모리 씨는 시코쿠 원정·규슈 정벌에 참여했으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지쿠젠·지쿠고 37만 석을 받았고, 모리 데루모토와 함께 도요토미 고다이로(五大老)로 중용되었습니다.

이 인사는 다카마쓰 성 강화 교섭에서 추격하지 않은 은혜에 대한 보답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규슈의 오토모 소린 군이라는 변수

만약 히데요시를 추격하려면 모리 군 전체를 영지 동부로 집결시켜야 했습니다.

그 경우 규슈 서방에서 오토모 소린의 침공이 예상되었습니다.

전군을 몰아 히데요시와 싸운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패배하면 「주군 노부나가의 적을 갚는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히데요시에게 반역자로 간주되어 모리 씨 멸망의 위기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반역자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돕는 것은 모리 씨에게 있어 감히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나온 뒤에 움직이는 편이 모리에게 유리하다고 설득한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승리하면 은혜를 판 셈이 되어 모리 가문의 미래가 안전해지고, 설령 패배하더라도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모두 사라지므로 오다 가문에게 빼앗긴 빗추·미마사카·호키를 되찾을 기회도 생깁니다. 그러니 지금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육로와 해로를 모두 사용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 군이 다카마쓰 성에서 철수할 때, 축수해 두었던 해자의 물을 터뜨려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모리 군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또한 해상에서는 무라카미 수군의 일부가 히데요시 측에 가담해 있어 바다에서도 원활한 추격이 불가능했습니다.

산을 돌아가는 우회로도 있었지만, 시간 낭비와 병사들의 피로를 고려하면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만약의 추격에 대비해 우키타 히데이에 군 1만을 배치해 두었기 때문에, 추격했다 해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모리 씨 내부에서는 추격파인 기카와 모토하루의 의견이 강했지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여기서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팔아 잃었던 영지를 회복하고 내정을 다지는 것이 좋겠다」며 모토하루 이후의 추격파를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승리하고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히데요시는 다카카게에게 은혜를 느껴,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도요토미 고다이로에 서열시켰습니다.

모리 씨는 추격하지 않음으로써 전란의 세상을 무사히 살아남았고, 막말에는 웅번(雄藩)으로 성장해 메이지 유신을 이루어냈습니다.

만약 모리가 추격했다면?

만약 모리 군이 추격했다면, 하시바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지 못했을 것이고, 시바타 가쓰이에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 사후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릅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승리했다면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를 옹립해 오다 정권의 재건을 목표로 했을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했다면 도쿠가와 정권이 한층 일찍 성립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모리 씨는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서 번영하지 못했을 것이고, 막말의 조슈 번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약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다 정권이 성립했다면 정치의 중심은 교토에 놓였을 것이고, 도쿠가와 정권이 성립하더라도 막부는 에도가 아닌 하마마쓰 부근이 일본의 중심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상을 즐기는 것도 역사의 큰 매력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마음껏 '만약의 역사'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