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원자폭탄 투하와 태평양 전쟁의 종식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 시작

1942년 4월 18일, 미군이 감행한 최초의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16대의 B-25 폭격기가 도쿄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공습'이 그 시초입니다. 이후 한동안 공습은 중단되었지만, 미국이 B-29 폭격기 양산에 성공하면서 1944년 11월부터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미군의 움직임

미국은 일본이 점령했던 사이판·티니안·괌을 탈환한 뒤, 이 세 섬을 일본 본토 공습의 전진 기지로 활용했습니다. 티니안섬 북부의 마리아나 기지에는 무려 1,000여 대의 B-29가 배치되어 도쿄를 여러 차례 폭격했습니다.

미군 공습의 주요 목표는 도쿄, 가와사키, 요코하마,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이었습니다. 당시 이들 도시에는 군수공장과 군사 시설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무기 생산력을 꺾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 시설이 밀집한 도시를 목표로 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전황이 장기화되면서 공습 범위는 주거 지역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노동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주거 지역을 공격해 노동력 부족을 초래하고,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꺾으려는 의도였습니다.

도시 지역 폭격은 폭탄을 카펫처럼 고르게 뿌리듯 투하한다고 하여 '무차별 융단 폭격'이라 불렸습니다. 주거 지역까지 폭격 대상이 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격화되는 공습

1945년 3월 9일 자정부터 10일 새벽까지 미군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쿄 상공에 나타난 약 300대의 폭격기가 도심 일대에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이 폭격으로 약 10만 명이 사망하고 약 100만 명이 부상 또는 이재를 입었으며, 27만 호가 소실되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발생한 이러한 민간인 피해 규모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다음으로 컸습니다. 이후에도 5월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친 폭격으로 시부야·신주쿠·메구로 등 야마노테 지역의 도시 절반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공습은 계속 반복되어 종전 때까지 도쿄에는 약 130회의 폭격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도쿄만 공습당한 것은 아니며, 나고야, 오사카, 하마마쓰 등에서도 대규모 공습이 잇달았습니다. 종전까지 전국 약 200개 도시·정·촌이 공습을 받았고, 67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미군은 B-29를 포함해 총 3만 3,000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켜 폭탄 등 16만 톤을 투하했으며, 인명 피해는 약 6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일본의 많은 도시가 공습을 받았지만, 유일하게 교토는 중요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토에게 전쟁이라 함은 '오닌의 난'을 의미한다고 할 만큼, 교토는 전란의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습니다.

오키나와 지상전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오키나와 지상전입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군 기지 문제의 뿌리도 이때의 지상전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1944년 8월, 오키나와에서는 본토보다 앞서 주민 대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 본토로 피신하던 학동들을 태운 배 '쓰시마마루'가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격침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군이 이미 일본 근해에서 잠수함 작전을 개시할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 서쪽의 게라마 제도에 상륙했습니다. 이후 약 3개월에 걸쳐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곧 전장이 되었고,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몰려든 주민들과 히메유리 학생대, 철혈근황대 소속 소년소녀들 사이에서는 '집단 자결'이라는 비극까지 빚어졌습니다.

결국 6월 23일, 우시지마 미쓰루 사령관이 자결하기까지 오키나와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는 본토 결전의 방패 역할을 강요당하며 처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와 포츠담 선언

대규모 공습의 반복과 오키나와 지상전으로 일본 전역은 완전히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항복으로 몰아넣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 본토 상륙 작전',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1943년 무솔리니 실각 후 무조건 항복했고, 1945년 5월에는 나치 독일이 항복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미국·영국·소련 정상이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포츠담 회담이 열렸습니다.

회담 기간 중인 7월 26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 장제스 주석이 공동 명의로 '일본군 전체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13개 조항의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 최후 통첩'이며, 선언을 발표한 3개국에 대한 예우를 담아 '미영중 3국 공동 선언'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 포츠담 선언에 대해 결전 노선을 고수하며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선언 거부가 원폭 투하의 빌미가 되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는 무려 14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8월 8일 소련은 소일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한 뒤, 다음 날인 8월 9일 만주, 한반도, 남사할린(가라후토)으로 침공했습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 수용을 논의하는 회의를 진행하던 중, 같은 날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용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을 국민에게 알리는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 이른바 옥음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옥음방송이 있었던 8월 15일을 종전의 날로 기념하며,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은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에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