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하면 '세 개의 화살' 일화가 가장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일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다만 창작이라고 해도, 이런 전설이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모리 모토나리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일화가 완전한 허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바탕이 된 문서가 실제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리 모토나리가 남긴 '삼자 교훈장'
전국시대 아키 국(安藝國)의 영주였던 모리 씨는 주고쿠 지방과 규슈 일부를 지배하는 석고 170만 석이 넘는 대영주로 성장했습니다. 전투와 모략을 구사하며 50년 인생을 보낸 모토나리가 자신의 사후 모리 가문의 미래를 염려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557년, 세 아들인 모리 다카모토, 기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삼자 교훈장(三子敎訓狀)'을 남겼습니다. 이 문서는 모리 모토나리의 친필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야마구치현의 모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14개 조항에 걸쳐 모리·기카와·고바야카와 세 가문이 협력하는 체제, 이른바 '모리 양천(兩川) 체제'라 불릴 만한 독창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리 모토나리의 세 개의 화살 교훈'은 바로 이 삼자 교훈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실제 삼자 교훈장을 읽어보면 화살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지만, '세 아들에게 남긴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그 취지는 통합니다.
일부를 현대어로 옮겨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3조
말할 것도 없이 셋의 관계는 조금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셋 모두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겨우 살아남는다 해도, 가문의 이름을 잃고 한두 사람이 명맥만 이어간다면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슬픔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4조
다카모토는 모토하루와 다카카게의 도움을 받아 모든 일에 지시를 내려야 한다. 또한 모토하루와 다카카게는 모리 본가가 강한 동안에는 각자의 가문을 지킬 수 있다. 지금은 스스로 제 집안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모리 본가가 약해지면 집안 사람들의 마음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제6조
이 가르침을 손자 대에도 꼭 명심해 주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모리·기카와·고바야카와 세 가문은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허나 그렇게 바랄 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끝까지 지켜주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적어도 삼대는 이 마음가짐이 없으면 가문의 이름도 이익도 모두 잃고 말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는 후사가 없어, 히데요시의 조카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로서 가문을 이었지만, 히데아키가 죽은 뒤 가문은 흔적도 없이 단절되었습니다. 반면 모리 본가와 기카와 가문은 전국시대부터 에도 시대를 거쳐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그 명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 개의 화살 일화
확인 차원에서 '세 개의 화살' 일화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모토나리는 세 아들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를 불러 한 사람씩 화살을 주며 부러뜨리라고 명했습니다. 아들은 화살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부러뜨렸습니다.
이번에는 화살 세 개를 한데 묶어 다시 부러뜨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부러뜨리지 못했습니다. 모토나리는 연약한 화살 하나도 함께 묶으면 단단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세 형제가 하나로 뭉치면 타국의 침공도 두렵지 않다는 교훈을 남긴 일화로 전해집니다.
세 개의 화살이 신화라고 말하는 근거
앞서 말했듯이 이 이야기가 신화인 결정적인 이유는 모리 모토나리가 1571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향년 75세였습니다. 그런데 맏아들 다카모토는 8년 앞선 156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메고(尼子) 가문 토벌에 참전하던 중 41세의 나이로 급서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토나리가 사망할 당시 모토하루는 41세, 다카카게는 38세로 이미 성인이었습니다. 어린아이라면 묶은 화살을 부러뜨리지 못하는 장면을 이해할 수 있지만, 성인 남성이라면 세 개 정도 묶인 화살은 충분히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모토나리는 임종 때 세 아들을 불렀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남자 10명, 여자 2명 등 총 12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더 파고들면 의문점은 많지만, 위의 사실만 놓고 봐도 모리 모토나리의 임종 장면 설정은 분명히 신화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후의 모리 양천 가문
모리 모토나리 사후 열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기카와·고바야카와 세 가문은 정작 서로 협력하지 못했습니다.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 총대장으로 참전했고, 기카와 히로이에는 불참하며 중립을 지켰으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동군으로 배신하여 서군 패배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그 결과 서군의 패배로 모리 본가는 석고 120만 석에서 36만 석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선대의 가르침을 지키지 못한 후손들은 결국 모리 가문의 존속 위기를 맞았습니다. 다행히 그 위기는 넘겼지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모리 씨는 에도 시대 내내 번(藩)으로 존속하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도쿠가와 막부에 종언을 고한 것은 바로 사츠 동맹의 주축인 모리와 시마즈 번사들이었습니다.
현재 모리 모토나리의 후손은 야마구치현 호후시에 거주하는 모리 가문 21대 당주입니다. 모토나리는 자녀가 많았기 때문에 후손은 남녀 모두 많아, 지금은 수백 명에 이른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