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년 을사의 변(乙巳の変)이 일어나 일본에 큰 개혁이 단행되기 전부터, 일본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618년, 동아시아의 정세는 극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 학설이 있지만,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가 일본의 대개혁과 을사의 변 이후의 근본적인 변혁을 불러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당나라의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장기적으로 유지되는 수도를 창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은 거대 강국인 당나라와 대등하게 맞서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력과 권위를 높이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랜 기간 궁정이 머물 수 있는 도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스카 시대 말기였습니다. 나라현 가시하라시에 건설된 후지와라쿄(藤原京)입니다. 책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당나라의 도시를 본떠 만들었지만, 견당사가 가져온 보고를 통해 실제 당의 수도 장안(長安)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것이 후지와라쿄가 새로운 도시로 천도를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천도가 결정된 수도가 바로 헤이조쿄(平城京)입니다. 나라 분지 북부에 자리한 이곳은, 710년부터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할 때까지 일본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 시기를 나라 시대라고 부릅니다. 과연 나라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지금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견당사(遣唐使)의 파견
이웃나라가 어마어마한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정보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극도로 위험한 바다 항해에도 불구하고 견당사는 약 20년 주기로 꾸준히 파견되었으며, 당시에는 한반도 인근의 발해국과도 사절단을 상당히 자주 오가며 교류했습니다.
정사(大使)뿐만 아니라 유학생과 유학승 등 다양한 인재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떠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많았고, 당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선진적인 정치 제도와 국제적인 문화가 유입되면서 헤이조쿄는 이름 그대로 '국제도시'라 불릴 만한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헤이조쿄의 구조와 지방과의 연결
헤이조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중앙집권 국가를 지향하던 조정이 만든 최초의 장기 수도 후지와라쿄는 책을 참고해 당풍 도시를 지었지만, 정작 당의 수도 장안과는 닮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장안을 목격한 사람들의 생생한 정보를 바탕으로, 남북동서로 뻗은 바둑판 모양의 도로로 도시를 구획하는 조방제(条坊制)를 채택하게 됩니다.
도시는 남북으로 뻗은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축으로 동쪽 좌경(左京)과 서쪽 우경(右京)으로 나뉘었고, 북쪽 끝에는 헤이조궁(平城宮)이 자리했습니다. 헤이조궁 안에는 천황의 생활 공간과 정무를 처리하고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이관(二官)·팔성(八省) 등의 관청도 함께 들어서 있었습니다.
헤이조쿄로 천도한 이후에도 701년에 제정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의 체계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관팔성 등 관위 체계와 정치 제도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관련 글을 함께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헤이조쿄에는 귀족·관리·평민의 주거지가 들어섰는데, 우경은 늪지가 많아 건물을 짓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인구 약 10만 명의 대부분은 좌경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귀족들은 좌경의 헤이조궁 인근에 살았고, 그보다 아래의 하급 관리와 평민들은 남쪽 지역에 모여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다이안지(大安寺)·야쿠시지(薬師寺)·코후쿠지(興福寺) 등의 사찰이 들어섰고, 후에는 토다이지(東大寺)와 사이다이지(西大寺) 같은 대형 사찰도 차례로 건립되었습니다.
헤이조쿄의 경제 상황은 어땠을까?
좌경과 우경에는 관영 시장(市)이 설치되어, 각지에서 올라온 물산과 관리의 봉급인 포(布)와 실을 교환하는 거래가 활발해졌습니다. 수도에서 먼 동쪽 무사시국(武蔵国)에서 동이 헌상되자 화동개진(和銅開珎)이라 불리는 화폐가 주조되었고, 이 화폐를 사용해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헤이조쿄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을 통해 당시 시장의 활기찬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누구나 가게를 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가야왕(長屋王)과 같은 유력 귀족도 가게를 운영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습니다. 비단과 목면, 바늘이 달린 띠, 빗, 붓과 벼루, 검 같은 무기류는 물론 쌀·소금·기름 등의 생활 잡화까지, 판매되는 물품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귀족들은 저택에 여러 장인을 두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또한 조(租)·용(庸)·조(調)라는 세금을 헤이조쿄로 운반해 납부하고(조를 헤이조쿄로 운송하는 특별한 부담도 존재했습니다), 남은 물자를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필요한 세금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시장에서 부족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가격은 오늘날처럼 판매자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협상을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거래가 반복되면서 가격이 어느 정도 명확해지자, 시장을 감독하는 관리 '시사(市司)'가 만든 일종의 가격표가 협상의 기준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시사는 유통되는 물건뿐만 아니라 불량 화폐나 결함이 있는 화폐도 단속했습니다.
헤이조쿄로 이어지는 교통망은?
율령제 아래에서 법제가 정비되는 가운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기 위해 수도에서 칠도(七道) 각지로 뻗어나가는 관도(官道, 역로)가 정비되었습니다. 농민들은 이 관도를 이용해 헤이조쿄로 조·용·조를 운반해 납부했습니다.
관리의 이동을 위해서는 역전(駅伝)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약 16km마다 역가(駅家)를 두어 말을 배치했고, 이 역마는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역마 제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율령 국가와 도로 정비에 관한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큰길이 정비되는 한편, 지방에서는 군가(郡家)를 연결하는 작은 길(伝路)도 정비되었습니다. 참고로 군가란 국(国) 아래에 두어진 관청을 말합니다.
지방의 국가 시설 살펴보기
앞서 언급한 지방 행정 조직의 구조를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선 가장 큰 전제로, 지방에서 하나의 단위로 묶인 지역을 '국(国)'이라 불렀습니다. '야마시로국(山城国)'과 '무사시국'이 바로 각 지역의 이름으로, 오늘날의 ○○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각 국의 행정 중심지에 해당하는 곳이 국부(国府)입니다. 국부는 정무와 의례를 수행하는 국아(国衙), 각종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군, 세납된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군, 그리고 오늘날 지사에 해당하는 국사(国司)의 관저까지 갖춘 정치·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에는 종교에 대한 신앙심도 매우 열렬했습니다. 그래서 국부 근처에는 고쿠분지(国分寺)도 건립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 체제가 점차 확립되어 갔고, 중앙 정부의 권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