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협약
1951년, 미국이 일본을 통치한 지 6년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평화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동시에 미일(日美) 안보협약도 맺어졌습니다.
특히 미일안보협약 제6조에는 "일본의 안전과 극동 지역의 국제 평화 및 안보를 위해, 미군이 일본 내 시설과 구역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은 미군의 주둔과 군사기지 사용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의도는 1948년 건국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1949년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소련 등 공산 진영에 대비해 일본을 '공산권 방파제'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들
일본 전역에는 다음과 같은 미군기지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 가데나 공군기지 (오키나와)
- 요코타 공군기지 (도쿄)
- 아쓰기 기지 (가나가와현)
- 요코스카 기지 (가나가와현)
- 이루마 기지 (사이타마현)
- 미사와 기지 (아오모리현)
- 이와쿠니 기지 (야마구치현)
- 사세보 기지 (나가사키현)
그런데 일본 내 미군기지 면적의 약 75%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본토의 미군기지에 배치된 병력이 정예 부대라면, 오키나와의 미군은 주로 해병대(Marines)입니다. 해병대는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그날 밤이라도 전장으로 투입될 수 있는 신속대응 부대입니다. 미군은 육·해·공군과 해병대로 나뉘는데, 해병대는 함선에 승선해 가장 먼저 전선에 돌진하는 부대입니다.
2009년 기준으로 주일미군 병력은 약 36,000명이며, 그 중 60%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하필 오키나와에 집중되었을까?
그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데서 시작됩니다. 종전 후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주민들을 수용소로 몰아넣고, 주민들의 허락 없이 마을과 논밭을 파괴한 채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전후 일본 영토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와 함께 반환되었지만, 오키나와만은 계속 미국의 점령 상태로 남았습니다.
전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인 미국과 사회주의 진영인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 구도로 접어들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중국·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미국·일본 등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긴장이 한층 강해졌습니다. 냉전기 오키나와는 미군에게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기지가 오키나와에 집중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정식 반환될 때까지 이곳이 미국 영토였고 미국이 자국 땅에서처럼 자유롭게 기지를 지을 수 있었다는 점이 핵심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미국은 자국 외부에 35개의 해외 미군기지를 두고 있습니다. 냉전기에는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를 견제하기 위해 오키나와가 특히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기지는 태평양에서 중동·동유럽까지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걸프전 때도 오키나와발 전투기 다수가 활약했습니다.
이처럼 오키나와는 여러 방향으로 손쉽게 출격할 수 있는 태평양의 요충지입니다. 현재도 중국의 해양 진출이 활발해지고 러시아가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아시아 지역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국은 여전히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중요한 거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중동에서 이슬람 과격파 조직을 지원하려는 국가들이 있어 중동에서 아시아까지 경계가 필요한 상황이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는 것보다 가데나 기지에서 출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주일미군 주둔 비용 (상경 예산)
주일미군 주둔 비용 중 일본이 부담하는 금액은 2019회계연도 기준 약 1,974억 엔에 달합니다. 원래 미일행정협정에 따르면 비용은 원칙적으로 미국이 부담하지만, 미국의 무역 적자 확대 속에 일본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1978년부터 '상경(想慮) 예산'이라 불리는 특별 분담금 제도가 도입되어 일본이 일부를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부담하는 항목에는 시설 건설비, 광열비, 통신비, 기지에서 일하는 일본인 종업원의 임금 등이 포함됩니다.
주일미군의 특권 — 미일 지위협정
기지 안은 '일본이 아니면서 일본'인 공간이며, 미일 지위협정이라는 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협정은 주일미군의 특권을 규정하며, 대표적인 특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본 경찰이 용의자를 기지 밖에서 검거하지 않는 한, 미군이 기소될 때까지 조사 기간 동안 억류한다.
- 면세 혜택 (기지 내 매점에서 판매되는 생필품, 담배, 맥주 등은 '군이 조달한 물자'로 관세와 소비세가 면제됨)
- 항공법 적용 제외 (= 저고도 비행 및 야간 비행 허용)
- 도로 사용료 및 NHK 수신료 면제
- 여권 불필요
오키나와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미군 장병·기지 종업원과 그 가족이 일본에서 차를 구입하면 번호판에 알파벳 'Y'로 시작하는 문자가 새겨집니다. 이 차량들은 과속 단속이나 불법 주정차 단속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키나와 현에서는 '이런 차량은 결코 사고를 내서는 안 된다. 만에 하나 사고가 나면 국제 문제가 된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입니다.
미군 자녀들은 기지 내 학교에 다니며, 주요 기지에는 병원도 함께 운영됩니다. 요코타 기지의 미군 가족용 주택은 3LDK형으로 한 가구당 약 135㎡에 달해, 임관급 가족 주택조차 65㎡ 수준에 불과한 자위대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 큰 규모입니다.
오키나와 기지 문제
오키나와 기지 문제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피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충돌 사고의 위험
- 소음과 진동 피해
- 미군 병사에 의한 범죄 피해
- 악취와 환경 오염
환경 오염의 경우, 군용기 타이어가 활주로에 마찰할 때 나는 냄새가 폐유와 섞이고 뜨거운 공기와 어우러져 끔찍한 악취가 되어 인근 가옥으로 들어오며, 기지 건설 등으로 인한 환경 오염도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지위협정 개헌론과 오키나와 기지 문제의 역사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기 전까지, 미국의 통치와 기지 건설을 위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땅은 잇달아 수탈당했습니다. 오키나와 반환 당시에는 '본토와 같은 수준으로 주일미군 기지를 축소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방대한 미군기지는 그대로 남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95년 오키나와에서 미군 병사에 의한 소녀 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미군은 미일 지위협정 조항을 근거로 범인을 기지 내에 억류한 채 인도를 거부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키나와 각지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고, 미일 안보체제와 미일 지위협정 재검토 논의가 크게 고조되었습니다.
현민의 기지 재편·축소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같은 해 11월 미일특별행동위원회(SACO)가 설치되었고, 향후 5~12년 안에 오키나와 내 미군기지의 21%에 해당하는 5,000헥타르를 반환하고, 후텐마 기지 반환에 따른 대체 헬리포트를 건설하며, 미일 지위협정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SACO는 해산되었고, 실현 작업은 미일 안보 고위급 실무 협의로 이어졌습니다.
한편 기지가 사라지면 현민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기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생계상의 이유로 기지 존재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1950년대 오키나와의 미군경제 의존도는 50%였지만, 2015년에는 관광 수입 증가로 5%까지 낮아졌습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토지 문제
오키나와 본섬의 5분의 1이 미군기지이며, 기지 면적 중 국유지는 3분의 1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땅은 미국 통치 시절 주민들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사유지를 잇달아 기지로 만든 것입니다. 1950년대에는 미군이 갑자기 등장해 중장비로 주택과 농경지를 파괴하고 기지로 사용한 곳도 있다고 전해집니다. 후텐마 기지도 오키나와 전투를 살아남은 주민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미군이 주택과 논밭을 짓밟으며 지은 기지입니다.
현재 수탈된 땅은 일본 정부가 주민에게서 임대한 뒤 미국에 제공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런 지주는 오키나와 현내에 약 33,000명에 이르며, 연간 임대료는 약 783억 엔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나와 반환 이후 임대에 반대하는 지주 약 3,000명은 '반전지주(反戰地主)'라고 불렸지만, 많은 이들이 국가의 행정 수단에 의해 계약을 강요당했습니다.
토지 강제 사용까지의 절차
국가가 지주에게 계약 청구 → 지주가 서명하면 계약 성립 및 사용
↓
지주가 서명 거부
↓
시町村장이 대리 서명 → 오키나와 수용위원회 심사 → 허가되면 사용
↓
현지사가 대리 서명 → 오키나와 수용위원회 심사 → 허가되면 사용
↓
총리대신이 대리 서명 → 오키나와 수용위원회 심사 → 허가되면 사용
주둔군용지 특조법(특별조치법)의 개정
1995년, 당시 113명의 반전지주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주둔군용지 특별조치법(특조법)을 만들어 토지를 강제로 제공받았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현 수용위원회 심사를 거치는 등 절차가 복잡하고 강제 사용 기간에 제한이 있어, 1997년 특조법이 개정되었습니다.
개정법은 소유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용위원회 심사 중이라도 미군기지용지로 강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오키나와현에만 적용되는 법을 만든 것입니다. 개정 내용에 따르면 수용위원회가 국가의 신청을 기각해도, 국가는 건설성에 심사 신청(불복 신청)을 할 수 있고 건설성이 이를 승인하기 때문에 수용위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개정으로 수용위원회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도로를 건설할 때도 개인 재산은 절대적이지만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다. 이것과 같은 원리다'라는 생각인 듯합니다. 1997년 5월 14일, 가데나 기지를 포함한 12개 미군시설의 임대 기한이 만료되는 날을 앞두고 서둘러 이루어진 법 개정이 아니었느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후텐마 반환
후텐마 기지는 기노완시 한복판에 위치하며, 오랫동안 반환이 요구되어 왔습니다. 기지는 기노완시 면적의 25%를 차지하며 소음 문제와 사고 위험이 우려되고, 기지 주변에는 학교와 병원이 많아 실제로 소음과 오염이 심각한 지역입니다.
1996년 4월,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를 5~7년 안에 일본에 반환하기로 합의했지만, 반환 조건으로 오키나와현 내에 대체 기지를 만들어 헬리콥터와 병력을 이전하는 것이 제시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전 후보지는 미 해병대 캠프 슈와브(나고시)가 있는 헨코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여기서부터 후텐마 기지 이전을 둘러싼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후텐마 기지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미일 안보 재검토 없이는…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기지는 전후 삶과 직결된 문제로 마주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민의 모든 호소는 국가에 의해 일축되고 외면당하는 상태입니다. '국가'라는 존재가 국민의 목소리를 스쳐 지나가기 쉬운 탓일까요?
정치인들이 말하는 '선량한(善良한) 처분'이란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 '보류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반드시 실행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키나와 기지 문제를 보면 오키나와와 본토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본토의 미군기지는 대부분 1970년대까지 사라진 반면, 오키나와에서는 방대한 미군기지가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인들 사이에 이러한 인식 격차가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글쓴이 역시 오키나와에서 먼 북쪽 나라에 살다 보니 잘 느끼지 못했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여행에서 헨코 주변을 시위하던 현민들을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오키나와 기지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키나와 기지 문제를 들여다보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 즉 미일 안보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오키나와의 부담을 줄이지 않은 채 가장 위험한 기지인 후텐마가 단지 나고시로 옮겨질 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