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율령국가의 전환기, 장원의 성립과 무사(사무라이)의 성장

60대 천황인 다이고(醍醐) 천황과 62대 무라카미(村上) 천황의 시대는 '엔기·덴키의 치세(延喜・天暦の治)'로 불리며, 간파쿠와 섭정을 두지 않은 채 천황 자신이 직접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실제로는 좌대신으로서 후지와라 씨가 국정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등 섭관정치가 완전히 쇠퇴한 것은 아니었지만, 율령국가 체제에서 왕조 국가 체제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여러 가지 개혁이 단행된 시기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초기 장원의 쇠퇴

902년(엔기 2년)에는 불법적인 토지 점유를 금하고 율령제를 재건하려는 '엔기의 장원 정리령(延喜の荘園整理令)'이 반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호적과 계장 제도가 붕괴하여 조(租)를 제대로 징수할 수 없게 되었고, 조용조(租庸調) 징수만으로는 국가 재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은 고쿠시(国司, 지방관)에게 일정액의 세납을 계약으로 맡기고, 그 대가로 해당 국가의 통치를 위임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종전에는 고쿠시가 행정을, 군지(郡司)가 세금 징수와 문서 작성을 담당했지만, 이러한 정책 변화를 거치면서 고쿠시가 지방 정치에서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각국에 파견된 고쿠시 중 최고 실권자인 수령(受領)이 임명되었지만, 많은 수령들이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군지와 유력 농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무렵에는 사재를 내어 조정의 의식이나 신사·사찰 건설 등을 부담하는 대가로 관직을 받는 '공봉(功封)'과 '다임(多任)'이 행해졌습니다. 일종의 매관매직에 해당하는 수령을 비롯한 고쿠시들은 이러한 공봉과 다임을 통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편 수령 이외의 일반 고쿠시는 점차 실무에서 배제되어 부임하지 않고 봉급만 받는 '요닌(遥任)'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수령은 명망 있는 농민에게 일정 기간 밭을 경작하게 하고 그 권리를 선조 대대로 물려받게 하는 방식으로, 조(租)와 임시잡역에서 유래한 과역을 부과했습니다. 이때 논밭은 '묘(名)'라 불리는 단위로 나뉘어 부명(負名)이라 불렸는데, 이는 부담을 떠맡은 청부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호적에 오른 성인 남성에게 주로 세금을 걷던 율령 통치는 붕괴했고, 토지를 기준으로 부명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새로운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11세기 후반에는 수령이 임기 중에만 현지에 들르고, 대신 그 나라의 실무 책임자인 목대(目代)를 파견해 정치를 수행하는 형태가 일반화되었습니다.

기진형 장원의 발전

8세기에 탄생한 초기 장원(初期荘園)은 율령국가의 지방 통치 구조인 국·군리 제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10세기까지 상당수가 쇠퇴했습니다.

11세기에는 임시잡역을 면제받으며 특정 지역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개발령주(開発領主)로서 자신의 개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들 다수는 관청의 관리로서 지방 행정에 진출했지만, 일부는 세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영토를 중앙 귀족이나 권문세가에게 기진(寄進, 헌납)하고 자칭 영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진을 받아들인 장원의 영주는 '령가(領家)'라 불렸고, 장원이 더 높은 귀족이나 왕족에게 다시 기진될 경우 그 윗선의 영주는 '본가(本家)'라고 불렸습니다. 개발령주는 게시(下司) 등의 장원 관리직이 되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영토에 대한 사적 지배를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장원을 기진형 장원이라 부르며, 11세기를 거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렇게 확대된 장원 가운데 귀족이나 대형 사찰·신사의 권위를 배경으로 조세와 임시잡역의 면제, 즉 '불수(不輸)'를 인정받는 장원이 늘어났고, 고쿠시가 정한 기간 동안 불수를 허용하는 장원도 탄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발령주와 고쿠시 사이에 장원 내 불수의 범위와 대상을 두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장원의 특권을 내세워 견물사(遣物使) 같은 관의 사절 출입 자체를 거부하는 '불입권(不入権)'을 얻는 장원도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불수·불입권'이 확대되면서 장원 내 토지와 사람에 대한 사적 지배가 강화되었고, 이는 다시 기진형 장원의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쿠시는 장원을 정리하려 했지만, 장원 영주들과의 대립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무사의 성장과 반란

9~10세기 지방 정치의 격변 속에서 지방 호족과 유력 농민들은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점차 무장했고, 전국 각지에서 충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정은 추포사와 검비위사를 파견했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관청의 관리로서 현지에 남아 유력 무사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가족과 가신(郎党)을 규합해 세력 다툼을 되풀이했고, 때로는 고쿠시에게 반항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들 무사는 서로 연합체를 형성해 대규모 무사단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동국(東國)에서 좋은 말이 산출되었기 때문에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 무사단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일찍부터 동국에 뿌리내린 환무헤이씨(桓武平氏) 출신인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는 시모우사(下総)를 근거지로 고쿠시들과 갈등을 빚다가, 939년에는 히타치·시모츠케·코즈케의 국부(国府)를 공격해 동국의 절반을 함락하고 스스로 '신황(新皇)'이라 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무사인 다이라노 사다모리(平貞盛)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 이요(伊予)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 역시 세토 내해의 해적들을 이끌고(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 이요 국부와 다자이후를 함락했지만, 세이와겐지(清和源氏)의 시조인 미나모토노 츠네모토(源経基)에게 패퇴했습니다.

동서에서 벌어진 이 소란은 진정되었지만, 이를 통해 조정 군사력의 약체화가 드러났고, 오히려 지방 무사단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이 두 난은 발생 연간호를 따서 '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이라고도 불립니다.

1019년 도이(刀伊)의 입구 때는 규슈의 무사 후지와라노 타카이에(藤原隆家)의 지휘 아래 침입자가 격퇴되었으므로, 당시 규슈에서도 무사단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지방 무사의 힘을 실감하게 된 조정과 귀족들은 이들을 무사로 삼아 궁성 경비와 도읍의 치안을 맡기고, 지방에서는 고쿠시의 무사로 임명해 추포(범인 추적 포획)와 왕사(王事)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치안 유지를 의탁했습니다.

이처럼 무사는 점차 세력을 키워갔으며, 세이와겐지(淸和源氏)와 환무헤이씨(桓武平氏)는 지방의 무사단을 광범위하게 조직하여 무사 가문, 즉 무가(武家)를 형성해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