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는 1603년부터 1868년까지 260년 이상 지속된 일본 역사상 가장 긴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된 1603년을 시작으로,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막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할 때까지를 에도 시대로 봅니다.
이 에도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은 일본 최후의 무가 정권이었습니다.
막번 체제(幕藩體制)라는 통치 시스템
막부의 통치 체제는 막번 체제라고 불리며, 쇼군의 정부인 막부와, 쇼군과 주종 관계를 맺은 다이묘들의 영지인 번(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쇼군은 각 다이묘에게 영지를 보증하는 주인장(朱印狀)을 발급했고, 다이묘는 그 영지 안에서 일정한 자치적 통치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 체제는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폐지될 때까지 약 27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1615년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직후, 막부는 다이묘의 거성을 한 곳으로만 허용하는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을 내렸습니다. 나아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제정해 각 다이묘를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무가제법도는 쇼군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개정되었으며, 특히 3대 쇼군 이에미쓰 때 대폭 개정·보완되면서 막부의 통제력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조정과 사원·신사에 대한 통제
막번 체제 아래에서 조정(천황·공가)과 사원·신사 역시 막부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막부는 쇼군이 천황으로부터 임명받는다는 형식적 이유로 조정을 겉으로는 존중했지만, 실제로 황실의 영지는 극히 작았습니다. 게다가 1615년에는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를 제정해 천황과 공가의 행동까지 규제했습니다.
여기에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를 두어 조정을 감시했기 때문에, 막말에 이르기까지 조정이 정치적으로 활동할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문화적 역할은 상당히 컸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조정 외에도 사원과 신사는 더욱 엄격하게 통제되었습니다. 막부는 사사봉행(寺社奉行)을 설치하고, 각 종파별로 본산(本山)과 말사(末寺)를 조직하게 하며 사법(寺法)을 정해 규제했습니다. 그 결과 사원의 종교 활동은 위축되었고, 사원은 오늘날과 같이 단가(檀家)의 장례와 법사를 주로 담당하는 형태로 변모했습니다.
이에야스의 대외 정책
이에야스의 대외 정책은 평화주의를 기본으로 했습니다.
1600년 네덜란드 배가 분고(豊後)에 표류해 온 것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을 에도로 불러 외교·통상 고문으로 삼았습니다. 1609년에는 조선과 국교를 회복해 조약을 체결하고, 매년 20척의 무역선 왕래를 허용했습니다.
반면 기독교에 대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금교 정책(禁敎政策)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1613년에는 전국적인 기독교 금지령을 발표하고, 전직 기독교 다이묘였던 다카야마 우콘(도무 주스토)을 마닐라로 추방했습니다. 이러한 금교 정책의 배경에는, 새로이 일본에 온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이 스페인·포르투갈 식민지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는 점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한때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조선·중국, 류큐 등 여러 나라가 일본과 교역했지만, 기독교 금지와 함께 스페인·포르투갈과의 관계는 끊겼습니다.
영국 역시 네덜란드와의 통상 경쟁에서 밀려 자국으로 철수하면서, 유럽 세력 중 일본에 남은 나라는 네덜란드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해외에서 오는 배들은 오직 나가사키 항에만 입항하기로 정해졌습니다.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도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로 옮겨졌습니다. 막부는 데지마를 유럽 문물을 흡수하고 해외 정보를 얻는 창구로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쇄국 정책(鎖國政策)이라 불리며 20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해외로부터 산업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막부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다이묘 지배의 구조
1대 이에야스, 3대 이에미쓰, 5대 쓰나요시, 8대 요시무네, 11대 이에나리 등 스스로 정무를 주도한 쇼군도 있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쇼군은 로주(老中)를 비롯한 막신들에게 정무를 위임했습니다.
권력 집중을 피하기 위해 여러 로주가 월 단위로 교대하며 정무를 담당하는 월번제(月番制)를 도입해 권력 독점이 어려운 체계를 만들었고, 중요한 결정도 원칙적으로 합의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최고위직인 로주와 임시직인 로주카쿠(老中格), 그리고 이들을 보좌하는 와카도시요리(若年寄)는 모두 후다이 다이묘 중에서 선출되었습니다.
다이묘는 친번(親藩)·후다이(譜代)·도자마(外樣)의 세 종류로 나뉩니다.
친번 다이묘는 고산케(御三家, 기슈·오와리·미토)를 비롯한 도쿠가와 일문을 가리킵니다. 후다이 다이묘는 초기부터 도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신으로, 이이(井伊) 가문, 마쓰다이라(松平) 가문, 혼다(本多) 가문 등이 대표적입니다.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에 도쿠가와에게 신속(臣從)한 다이묘를 말합니다. 각 다이묘가 독립적인 통치를 허용받았기 때문에, 막부는 늘 도자마 다이묘의 동향을 경계했습니다.
친번과 후다이 다이묘는 에도 주변의 요충지를 장악했고, 도자마 다이묘는 주로 먼 지방에 배치되어 견제를 받았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대 이에야스부터 3대 이에미쓰에 이르는 에도 초기는, 다이묘를 통치하기 위한 엄격한 규율이 만들어진 시기였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규범이 정비되면서 전국시대라 불린 불안정한 시대가 비로소 진정으로 막을 내린 셈입니다.
막부의 통치 체제는 3대 이에미쓰 무렵 삼근교대제(參勤交代制)가 도입되면서 더욱 강화되어 완성되었습니다.
그 뒤 4대 쇼군 이에쓰나 대에 들어서며 도쿠가와 정권은 전성기를 맞이했고, 막부 정치 역시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에도 시대는 길기 때문에 약 네 편의 글로 나누어 다룰 예정입니다. 4대 쇼군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