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누마 오키츠구에 이어 막부의 재정 재건을 담당한 인물은 무쓰국 시라카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였습니다.
사다노부는 도쿠가와 막부의 고산쿄(御三卿) 중 하나인 다야스 가문 출신으로,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입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간세이 개혁
사다노부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한때 제11대 쇼군 후보로 거론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다누마 시대의 정치가 '뇌물 정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사다노부는 다누마와 멀어지게 되었고, 다누마를 경계한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 당주의 주선으로 시라카와 번 마쓰다이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고산쿄에서 벗어나 쇼군 후보에서도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훗날 다야스 가문에 후계자가 없어지자 양자 입적을 청원했지만 허락받지 못했고, 다야스 가문은 수십 년간 후계 공백 상태로 남게 됩니다.
한때 차기 쇼군로 주목받았던 사다노부는 다누마 오키츠구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으며, 심지어 그를 암살하려 시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반면 어떻게든 막부 중심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아첨하며 다누마 오키츠구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시라카와 번주 시절, 사다노부는 덴메이 기근(天明飢饉)을 계기로 번정 개혁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기근으로 도호쿠 각지가 큰 피해를 입는 동안에도, 사다노부가 다스리던 시라카와 번은 흉년에 대비해 미리 쌀을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11대 쇼군 이에나리의 계승 과정에서 다누마가 실각하자, 사다노부는 고산쿄의 추천을 받아 로주(老中)로 임명되어 막부 정치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는 상인과의 관계를 강화했던 다누마 시대의 노선을 전환하고, 할아버지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을 모범 삼아 1793년까지 약 6년에 걸쳐 막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세이 개혁(寬政改革)입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단행한 간세이 개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기엔령(棄捐令) — 채무 탕감령
요컨대 도쿠세레이(德政令)와 같은 성격의 정책입니다. 빚 때문에 생계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하타모토와 그 가족을 구제하기 위해, 쌀상(札差)들에게 하타모토에 대한 채권 포기와 채무 이자율 인하를 명령했습니다. 채권이 무효화되어 경영난에 빠진 쌀상들에게는 금융 지원을 통해 피해를 보완해 주었습니다.
2. 간세이 이학의 금(寬政異學の禁)
유학 가운데 성주학(朱子學)만을 정학(正學)으로 삼고 그 밖의 학문은 금지한 정책입니다.
그 배경에는 농업과 상하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성주학이, 쇠약해진 막부 질서를 바로잡기에 가장 적합한 학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3. 치안 안정
생활 기반을 잃은 부랑민을 구제하고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들을 에도 이시카와지마에 모아 직업 훈련을 실시하고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이시카와지마에 세워진 이 시설은 '인족요장(人足寄場)'이라 불립니다. 아울러 마을이나 촌락에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준비금 제도인 '칠분적금(七分積金)'을 새롭게 도입했습니다.
4. 농촌 재건
막부의 핵심 재원인 연공미(年貢米) 수입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촌 재건에 힘썼습니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에도로 대거 몰려든 농민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가도록 권유하는 일련의 정책을 '구리귀농령(舊里歸農令)'이라고 합니다.
5. 위미(圍米)
흉년에 대비한 식량 확보를 위해 각 번의 다이묘들에게 사창(社倉)과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쌀과 조를 비축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사다노부가 지방 다이묘였던 시절부터 이미 시행해 오던 정책이기도 합니다.
마무리하며 — 간세이 개혁의 의의와 한계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경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민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절약을 강요했고, 이러한 정책들은 서민들의 반감을 사서 결국 그의 실각으로 이어지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간세이 개혁을 언뜻 보면 덴메이 기근으로 고통받는 서민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처럼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서민'은 주로 농민, 장인, 하급 무사를 의미하며, 상인은 그 범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는 상업을 중시했던 다누마 오키츠구의 정책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서민에 대한 과도한 통제와 상인에 대한 냉대 등으로 비판이 일었고, 막부 내부에서도 반발이 거세지면서 사다노부는 겨우 6년 만에 로주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은거 이후에는 시라카와 번의 번정 개혁에 다시 기여했는데, 별다른 특산물이 없던 이 번에서 마(馬) 생산을 장려하여 번 재정을 윤택하게 만들었고, 민정 운영에도 공헌하여 시라카와 번에서는 명군(名君)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여러 번주 가운데서도 그는 에도 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걸출한 정치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