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세 대개혁 중 하나인 덴포 개혁(天保の改革)은 로주(老中)였던 미즈노 다다쿠니가 주도한 막부의 정치 개혁입니다.
19세기 전반 일본 근해에는 외국 선박이 잇달아 출현했고, 덴포 대기근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까지 겹치면서 사회 불안이 날로 깊어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미즈노 다다쿠니가 노중수좌(首席老中)로 부상하며 막부 정치의 책임을 짊어지게 됩니다.
당시 막부 재정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요동치는 사회 정세 속에서 정치 기반 역시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즈노 다다쿠니는 과거 교호 개혁과 간세이 개혁의 선례를 참고하여 대대적인 정치 개혁에 착수합니다.
인환령 – 농촌으로 되돌려 보내다
첫 번째 정책은 에도로 유입된 농촌 출신 잡노동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인환령(人返しの令)이었습니다.
에도의 인구를 줄이고 농촌 인구를 늘려 쌀 생산량을 높이고, 나아가 막부의 연공(年貢)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에도로 떠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고향 농촌에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귀향시킨다고 해서 농업 소득이 늘어날 리 만무했고, 결국 이 정책은 큰 효과 없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카부나카마 해산령 – 특권 상인 조합의 해체
카부나카마(株仲間)는 막부의 승인을 받고 특정 상업 활동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던 상인 조합입니다.
당시 물가가 폭등하여 서민들의 삶이 극심하게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미즈노 다다쿠니는 그 원인이 카부나카마의 독점적 장악에 있다고 판단하고, 1841년 카부나카마 해산을 명령합니다.
특권 체제를 폐지하고 자유롭게 거래하게 되면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반대였습니다. 유통 질서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에도 시내는 큰 혼선에 빠졌고, 물가는 오히려 더욱 치솟았습니다.
몇 년 뒤 카부나카마는 다시 결성되었기 때문에, 이 정책 역시 실패했다고 평가됩니다.
상지령 – 영지를 막부에 바쳐라
1843년, 미즈노 다다쿠니는 상지령(上知令)이라 불리는 법령을 반포합니다.
이는 에도와 오사카 주변에 영지를 둔 다이묘와 하타모토에게 자신의 영지를 막부에 헌상하도록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산력이 높은 땅을 막부 직할령으로 편입해 세수를 확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한편 이 명령은 겉보기에는 막부의 일방적인 강요처럼 보이지만, 당시 다이묘들의 영지는 실질적으로 관리와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에, 반환받은 땅 대신 보다 관리하기 좋은 땅을 다시 분배해 주겠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땅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명령에 순응하는 다이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비옥한 땅을 내놓는 것을 꺼렸습니다. 특히 농민에게 빚을 진 다이묘나 하타모토는 영지가 옮겨지면 채무를 회수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웠고, 채권자 입장에서도 권리가 무효화되기 전에 미리 돈을 회수하려 했습니다.
결국 "이런 굴욕적인 명령에 굴복할 수 없다"며 일부 다이묘와 하타모토가 공개적으로 반대에 나섰고, 반대 여론은 순식간에 노중(老中) 내부로까지 번졌습니다. 결국 미즈노 다다쿠니는 안팎의 압박에 못 이겨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실패가 남긴 것 – 막부 권위의 추락
이처럼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모두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미즈노 다다쿠니의 덴포 개혁은 단 2년여 만에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개혁의 실패가 남긴 파장은 컸습니다. 막부가 스스로 드러낸 통치력의 한계와 약체성은 이후 막말(幕末) 혼란기로 치닫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