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암기법이 있습니다. 바로 "이이 쿠니 츠쿠로(いい国作ろう), 가마쿠라 막부!" 즉, "좋은 나라 만들자 가마쿠라 막부"입니다.
1192년을 재미있게 외우게 해주는 이 언어유희는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히지 않는 강력한 암기법으로, 수많은 학생들의 시험 공부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연도는 1192년이 아닌 1185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모두가 사랑하던 최고의 언어유희가 사라지고 새로운 암기법이 등장한 것이죠. 다소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 배경에는 분명한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오늘은 왜 최강의 언어유희가 바뀌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함께 파헤쳐 보겠습니다!
애초에 가마쿠라 시대란 언제부터였을까?
![[가마쿠라 막부 탄생] 왜 건국 연도가 1192년에서 1185년으로 바뀌었을까?](https://haru-labo.com/wp-content/uploads/2020/05/163486-500x375-1.jpg)
약 800년 전, 헤이안 시대 말기. 숙명의 라이벌인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는 '겐페이 전쟁'이라 불리는 오랜 항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번영을 자랑하던 헤이시는 겐지에게 멸망당했고, 겐지의 당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메이지 유신까지 무려 680년간 지속된 무가 정권, 즉 막부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1192년이 '좋은 나라 만들자 가마쿠라 막부'로 불리며 가마쿠라 막부 성립의 시작점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왜 연도가 바뀌었을까?
![[가마쿠라 막부 탄생] 왜 건국 연도가 1192년에서 1185년으로 바뀌었을까?](https://haru-labo.com/wp-content/uploads/2020/05/3097219_s-600x338.jpg)
사실 가마쿠라 막부 성립 연도에 대해서는 1192년 외에도 1185년, 1190년, 1183년, 1180년 등 다양한 설이 제창되어 왔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180년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시 토벌을 위해 거병하고, 가마쿠라에 들어가 새 저택을 세운 해입니다.
또한 고케닌(御家人)을 통솔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조직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가 설치되었습니다.
다만 이 시점은 남관동 지역만을 지배하는 세력에 불과했고, 헤이시는 여전히 서일본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1183년설
'주에이 2년 10월 선지(寿永二年十月宣旨)'로 조정이 요리토모의 동국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해입니다.
어려운 용어는 제쳐두고, 간단히 말해 천황이 내린 선지를 통해 요리토모의 동일본 지배가 공인된 것입니다.
1185년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 등의 활약으로 '단노우라 전투'(현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서 헤이시가 멸망했습니다.
조정은 요리토모에게 전국에 '슈고(守護)·지토(地頭)' 직책 설치를 허가했습니다.
슈고는 국(國)마다 한 명씩 임명되어 현재의 경찰 조직 수장에 해당하는 직책입니다. 지토는 국보다 작은 단위의 장원에 설치되어 주로 치안 유지와 연공 징수를 담당했습니다.
요리토모는 이미 동국에 슈고와 지토를 설치해 두었고, 이번 헤이시 멸망으로 서국에도 설치가 허가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본 전역의 군사적 권한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가마쿠라 막부 성립을 1185년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1190년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우곤노에노다이쇼(右近衛大将)'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궁궐을 호위하는 곤에후(近衛府)의 실질적 수장에 해당하는 직책입니다.
더 나아가 '쿠교(公卿)' 반열에 올라 무사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조정의 중추에 진입했습니다.
쿠교가 됨으로써 영지를 관리하는 조직인 '만도코로(政所)' 개설이 허가되었습니다. 이것이 1190년설의 근거입니다.
1192년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었습니다.
장군은 조정의 관직 중 하나로, 원래 조정에 복종하지 않는 도호쿠 지방의 에조(蝦夷)를 정복하기 위해 임명되던 직책이었습니다.
요리토모는 이미 도호쿠 지방에 강력한 세력을 쥐고 있던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필요했던 것은 '장군'이라는 칭호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무가의 당주로서 무가 정권이 본격적으로 출범했습니다.
이것이 1192년이 오랫동안 가마쿠라 막부 성립의 해로 여겨진 이유입니다.
'막부'라는 단어는 에도 시대 말에 붙여진 것?
![[가마쿠라 막부 탄생] 왜 건국 연도가 1192년에서 1185년으로 바뀌었을까?](https://haru-labo.com/wp-content/uploads/2020/05/3414542_s-600x450.jpg)
혹시 당시에는 '가마쿠라 막부'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늘날의 가마쿠라 막부는 무사들에게는 '가마쿠라도노(鎌倉殿)', 조정과 관료들에게는 '칸토(関東)'로 불렸습니다.
당시 '막부'의 의미란 단지 장군의 관저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에 왕을 대신해 지휘권을 쥔 장군의 관직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에도 시대에 중국학을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다가,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같은 무가 정권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마무리
이번 글에서는 "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연도가 바뀌었을까?"를 주제로 살펴보았습니다.
1192년과 1185년 외에도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 대한 다양한 설이 제창되어 왔으며, 오랜 기간 많은 논쟁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입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오늘부터 가마쿠라 막부를 열겠다!"라고 선언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시점을 '성립'으로 볼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가마쿠라 막부의 연도가 바뀐 것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발견과 고찰이 탄생하는 만큼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좋은 나라 만들자"의 날이 돌아올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