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인도 의회사회당(CSP)이란? 1934년 결성 배경부터 역사까지

의회사회당(Congress Socialist Party)이란?

의회사회당(CSP)은 1934년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내부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정파로, 인도 독립운동 좌파 진영을 상징하는 조직입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열풍이 불던 시기에, 국민회의 안의 젊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자본주의와 봉건제에 맞서기 위해 별도의 사회주의 조직을 만들면서 탄생했습니다.

결성의 배경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는 유럽을 비롯해 식민지 지배를 받던 여러 나라의 청년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인도 국민회의도 그 물결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역시 이 시기 사회주의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1927년 2월 브뤼셀에서 열린 억압받는 민족 국제회의에 참석했으며, 혁신적이고 좌파적인 성향 덕분에 회의 내에서 사회주의에 경도된 청년들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비하르 사회주의당과 초기 조직 활동

1931년 7월 자야프라카스 나라얀(Jayaprakash Narayan), 풀란 프라사드 베르마, 라훌 산크리티야얀이 비하르 사회주의당을 창당했습니다. 이 당의 목표는 사유재산도, 개인의 토지와 자본 소유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를 인도에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흐름 속에서 삼푸르난드(Sampurnanand), 푸라난드, 카말 파티 트리파티, 타라크 바타차르야 등은 각 주에 사회주의 모임을 조직했고, 봄베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유수프 메헤르 알리, M. R. 마사니, 아치윳 파트와르단, 카말라데비 차토바디아야 같은 젊은 사회주의자들도 이 운동에 합류했습니다. 1933년에는 전인도 규모의 사회주의 조직을 결성하자는 구상이 구체화되었으며, 자야프라카스 나라얀, 아치윳 파트와르단, M. R. 마사니, N. G. 고레, 아쇼크 메흐타, S. M. 조시, M. L. 단트왈라 등이 이 구상을 주도했습니다.

창당 과정

전인도국민회의위원회(AICC) 위원이었던 삼푸르난드는 1934년 4월 바라나시에서 논문을 발표하며 인도를 위한 실험적 사회주의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국민회의 내에서 세력을 넓혀온 자본주의적·봉건적 요소에 도전하기 위한 것으로,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공업·은행·토지를 국유화하고 자미다리(짐미다르)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방침도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1934년 입법평의회 진출을 지지하는 회의파 그룹이 등장하자, 국민회의 내 사회주의자들은 별도의 정당 결성을 결심하게 됩니다. 같은 해 5월 17일 파트나에서 아차리야 나렌드라 데브(Acharya Narendra Dev)의 주재로 사회주의자 회의가 열렸고, 그는 취임 연설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 결성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맞서 의회사회당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초대 서기로 선임된 자야프라카스 나라얀은 각 주를 순회하며 당의 확산에 힘썼습니다.

제1차 연례 대회 (1934)

1934년 10월 21일부터 22일까지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삼푸르난드의 주재로 의회사회당 제1차 연례 대회가 열렸습니다. 13개 주에서 약 150명의 대표가 참석했으며, 이 대회에서 당의 헌장과 강령도 확정되었습니다.

중앙집행부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서기장: 자야프라카스 나라얀
  • 부서기: M. R. 마사니, 모한랄 고탐, N. G. 고레, E. M. S. 남부디리파드
  • 위원: 아차리야 나렌드라 데브, 삼푸르난드, 카말라데비 차토바디아야, 푸루쇼탐 다스, 트리카크 다스, P. V. 데슈판데, 라만 마노하르 로히아, M. S. 조시, 아마렌드라 프라사드 미슈라, 찰스 마스카레냐스, 나브크리슈나 초우두리, 아치윳 파트와르단

자와할랄 네루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의회사회당의 결성에 지지를 보냈지만, 어느 쪽도 직접 당원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국민회의 우파는 이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발라브바이 파텔은 이를 어리석은 짓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농민·노동 운동으로의 확장

의회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농민, 노동자, 학생들의 관심은 빠르게 높아져 갔습니다. 1936년 러크나우에서는 N. G. 랑가 교수, 인둘랄 야그닉, 스와미 사하자난드 등의 노력으로 전인도 기상(키산) 대회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 자미다리 제도 폐지, 소작료 감면, 부채 탕제가 요구되었습니다. 이처럼 국민회의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좌우 대립과 1935년 인도통치법

이 무렵 국민회의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뚜렷한 진영 대립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좌파의 중심에는 네루가, 우파의 중심에는 파텔이 있었습니다. 간디는 사회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성향을 비판했지만, 동시에 우파와 한편이 되지도 않으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한편 영국 의회는 1935년 8월 2일 인도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 1935)을 승인했습니다. 국민회의는 만장일치로 이 법안을 거부했지만, 우파가 법안에 따른 관직 수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과 달리, 좌파는 사회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반대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36년 4월 러크나우에서 네루의 주재로 열린 국민회의 연례 대회에서는 1935년 법안이 강하게 비판받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법에 따른 선거 참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는 국민회의 내부 사회주의자들에게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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