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마디아프라데시가 남긴 인도 자유 투쟁의 발자취 — 1857년 봉기에서 독립까지

동인도회사의 지배와 1857년 인도르 봉기

1600년에 설립된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역을 명분으로 인도 내륙으로 세력을 넓혀 왔고, 결국 인도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는 강대한 권력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 지배에 맞선 저항 역시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1857년 7월 1일 아침, 사다트 칸과 바기라트가 주도한 반영(反英) 신호가 인도르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인도르에는 듀레드 대령을 비롯해 스택클 대령, 트래번 대령, 러들로 대위, 코브 대위 등 영국군 지휘관들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이미 그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애국 세력에게 간접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홀카르 군대의 승리와 바크타와르 싱의 희생

인도르의 코티 앞에서는 홀카르 군대와 영국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 장교 20명이 전사했고, 약 130만 루피어 가치의 물자가 애국 세력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듀레드 대령은 목숨만 건져 가족과 함께 세호레로 피신했으며, 그를 도운 이는 보팔의 시칸다르 베굼이었습니다.

한편 암제라의 바크타와르 싱 국왕은 보팔에 있던 영국군 주둔지를 공격해 완파했습니다. 영국 장교들은 자부아의 라지푸트 왕에게 몸을 숨겼으나, 바크타와르 싱은 이윽고 영국군에 체포되어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타티야 토페와 라니 락슈미바이의 항전

나나 사헤브 페슈와와 함께 영국에 맞서 싸운 타티야 토페는 북부·중부 인도에서 끊임없이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12월 6일 콜린 캠벨 경에게 패배한 후에도 그의 반영 투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 휴즈 장군은 사가르와 분델칸드 지역의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1858년 4월 4일, 자한시의 라니 락슈미바이는 칼피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22일 연합군은 휴 로즈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칼피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라니 락슈미바이와 타티야 토페는 그왈리오르로 진격하여 마하라자 신디아를 몰아내고 그왈리오르 요새를 손에 넣었습니다. 아그라로 피신한 신디아를 대신해 휴 로즈는 그왈리오르를 재공격했습니다.

양군의 결전에서 라니 락슈미바이는 남장을 하고 직접 전장에 나서 영국군을 상대로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중상을 입었고, 마침내 1858년 6월 전장에서 숨을 거두며 순국했습니다.

근대 민족운동의 전개

무장 봉기 이후 마디아프라데시에서는 근대적 민족운동이 차츰 조직화되었습니다. 자발푸르에는 혁명 단체가 결성되었고, 1915년에는 홈룰 리그가 설립되었습니다. 1923년 자발푸르에서 시작된 ‘깃발 사티아그라하’는 주 전역으로 확산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38년에는 보팔국 프라자 만달이 창설되어 식민 지배에 맞선 여론을 결집시켰습니다.

번왕국의 통합과 마디아프라데시의 탄생

독립 이후 사르다르 파텔의 통합 계획에 따라 각지의 번왕국들은 잇따라 합병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오늘날의 마디아프라데시 지역에서는 1948년 2월 1일부터 8월 25일 사이에 구 중앙주(C.P.)·베라르의 마하코샬 지역 15개, 빈디야프라데시 35개, 중앙인도 및 보팔 주 소속 26개 등 모두 76개의 번왕국이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1857년 봉기가 번진 마디아프라데시의 거점들

1857년 봉기의 불씨는 마디아프라데시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왈리오르, 시브푸리, 라드호가르, 므하우, 세호레, 보팔, 나고드, 자이트푸르, 파타리, 샤가르, 말톤, 쿠라이, 사가르, 하타, 푸테라, 다모, 힌도리아, 비자이라고가르, 슬리만바드, 라핫가르, 가다코타, 데오리, 히라푸르, 자발푸르, 마단푸르, 나르싱푸르, 람가르, 나라얀간지, 만들라, 세오니, 호상바드, 소하그푸르, 판치마르히, 하르다, 물타이 등이 대표적인 거점으로 꼽힙니다.

이처럼 마디아프라데시는 1857년 무장 봉기부터 20세기 민족운동, 그리고 번왕국 통합에 이르기까지 인도 자유 투쟁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 지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