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역사 이야기는 바로 '생맥 사건(生麥事件)'입니다.
말장난 같은 사건도 아니고, 쌀 도둑 사건도 아닙니다.
단지 일본의 '생맥 마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죠.
사건의 이름은 꽤 유명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결국에는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과 영국 사이에 전쟁까지 일어난 굉장히 큰 사건이었으니까요.
생맥 사건 무렵 일본은 어떤 시대였을까?
![[생맥 사건] 400명 대 4명? 문화 차이가 빚은 비극, 영국·사쓰마 전쟁으로 번지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81196.jpg)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검은 배(흑선)가 우라가에 나타나 개국을 요구합니다.
이때부터가 바로 '막막(幕末)' 시대의 시작입니다.
다음 해에는 미국과 '가나가와 조약'이 체결되면서 1639년부터 이어져 온 '쇄국(鎖國)' 정책에 종지부가 찍히게 됩니다.
사실 미국의 목적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청(중국)과 동아시아 무역의 경유지로서 일본 항구가 연료 보급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에 개국을 요청한 것뿐이었죠.
일본 입장에서는 갑자기 커다란 흑선이 나타나 덮치듯 들이닥친 느낌이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그저 '항구 좀 빌려줘' 수준의 부탁이었다고 합니다.
몇 년 후, 에도 막부는 천황과 조정의 뜻을 무시한 채 불평등조약인 '일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강행합니다.
당시 막부를 이끈 인물은 노중(老中)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였습니다.
막부의 대외 방침은 전국적으로 '개국'으로 급선회했고, 에도 시대 말기 특유의 혼란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합니다.
이이 나오스케는 막부를 비판하는 자들을 '안세이 대옥'으로 처벌했으며,
1860년에는 자신도 '사쿠라다문 외문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맙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생맥 사건'은 바로 '존왕양이(尊王攘夷)'와 '개국' 사이에서 흔들리던 시대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사쓰마 번 400명 대 기마 영국인 4명!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
![[생맥 사건] 400명 대 4명? 문화 차이가 빚은 비극, 영국·사쓰마 전쟁으로 번지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81153.jpg)
막말의 사쓰마 번은 선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가 막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양녀 아쓰히메(篤姫)를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의 정실로 시집보내는 등, 다음 쇼군을 정하는 '계승자 문제'에서 이이 나오스케와 직접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나리아키라는 훗날 메이지 유신에서 활약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 사쓰마의 젊은이들에게 깊은 신뢰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죠.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는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이자 당대 번주의 아버지로, 어린 번주를 대신해 사쓰마 번정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사건은 히사미쓰가 병력을 이끌고 에도를 방문한 뒤 교토로 돌아가던 길목, 나마무기 마을(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발생합니다.
관광하러 온 영국인?
![[생맥 사건] 400명 대 4명? 문화 차이가 빚은 비극, 영국·사쓰마 전쟁으로 번지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81160.jpg)
요코하마에 거주하던 클라크와 마셜, 마셜의 여동생과 함께 홍콩에서 관광차 왔다가 동행한 마거릿, 그리고 상하이의 상인 리처드슨.
이렇게 네 명의 영국인들이 말을 타고 승마와 관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제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언어와 문화 차이로 벌어진 비극!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이 무사시국 구라키군 나마무기 마을에 다가서던 때, 마침 정면에서 기마 영국인 4명과 마주치게 됩니다.
물론 행렬 선두의 사쓰마 번사들은 "말에서 내려 길을 비켜라!"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영국인들에게는 그런 문화가 없었고 언어도 통하지 않았기에, 단지 "비켜가라!"는 말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죠.
영국인들은 도로를 가로질러 길게 늘어선 행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결국 행렬 한가운데로 돌진해 버립니다.
사쓰마 번사들은 히사미쓰가 탄 가고(駕籠)와 충돌할까 염려된 나머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행렬을 방해하는 영국인들에게 여러 명이 칼을 휘둘러 버렸습니다.
리처드슨은 깊은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져 200m 밖에서 숨을 거두는데, 그를 벤 사람은 훗날 메이지 신정부에서 활약한 사이고의 소꿉친구 카이에다 노부요시(海江田信義)였다고 전해집니다.
클라크와 마셜은 중상을 입었지만 말을 달려 도망쳤고, 마거릿은 모자가 날아간 정도의 타격으로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생맥 사건 이후!
![[생맥 사건] 400명 대 4명? 문화 차이가 빚은 비극, 영국·사쓰마 전쟁으로 번지다!](https://www.historyback.com/article/uploadfiles/202207/2022072209281276.jpg)
배상금과 범인 인도!
시마즈 히사미쓰와 사쓰마 번은 "갑자기 나타난 낭인 3~4명이 외국인을 베었다. 사쓰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범인을 찾는 중이지만 아직 잡지 못했다"고 버텼습니다.
영국 측에서도 무기를 들고 즉각적인 보복에 나서야 한다는 파와, 전면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막부와 외교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는 파로 의검이 분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영국은 막부에 공식 사과와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합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90억 엔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후일 15대 쇼군)는 이 지급을 거부했지만, 영국이 전쟁 준비에 착수하자 노중 오가사와라 나가미치(小笠原長行)가 지급에 동의합니다. 이 결정이 사실은 요시노부의 지시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어서 영국은 사쓰마 번에 범인 처벌과 2만 5천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쓰마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군함 7척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만에 진입하자 포격을 개시하면서 '영국·사쓰마 전쟁(薩英戦争)'이 발발합니다.
개전 이틀 후 영국 함대는 가고시마 만을 떠났지만, 사쓰마 측은 시가지가 불탔고 영국 측도 군함 좌초, 함장과 부함장의 손실 등 큰 피해를 입으며 전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양측은 서로를 자세히 알고자 하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서로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죠.
배상 문제 역시 다음 날 영국에 지급되며 사건은 일단락됩니다.
범인에 대해서는 "도주 중"이라는 이유로 끝내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반응!
사건 직후 사람들은 "사쓰마 대단해!"라며 열광했고, 교토에서는 고메이 천황께서 직접 히사미쓰를 칭찬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그다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외국 측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생맥 사건 이전에 사쓰마 행렬과 마주쳤던 적이 있는 미국 상인들은, 다이묘 행렬을 방해하는 행위가 일본 문화에서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잘 알고 있어서 마주칠 때마다 말에서 내려 길가로 비켜서고 정중히 모자를 벗곤 했습니다.
그들은 네 명의 영국인에게 이 사건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당시 '뉴욕 타임스'에도 이 사건이 실렸는데, 리처드슨이 무례하게 행동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조약은 거주와 무역의 자유를 허용하지만, 일본의 법률과 관습을 침해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죠. 꽤나 명쾌한 말입니다.
하지만 막부 측에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히사미쓰가 에도에 오는 길에도 같은 식으로 기마 외국인과 마주쳤을 때 이번처럼 무례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는 "사소한 일은 눈을 감겠다!"며 에도에 도착하자 번사들에게 "각국 공사관에 무례행위를 삼가달라고 통보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막부의 답변은 "이미 통보했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막부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이없는 대응이죠.
해외를 방문할 때는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를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 바로 생맥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