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와이탕이 조약 서명 이후, 마오리·영국인·파케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나?

1840년 뉴질랜드에서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은 뉴질랜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서명 당시 참여한 사람들—마오리 원주민, 영국인, 그리고 이후 도래한 파케하(Pākehā)—각자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오리(Māori): 상실과 저항의 시대

  • 조약에는 약 500여 명의 마오리 족장이 서명했습니다.
  • 그러나 조약은 마오리어로 정확히 번역되지 않았고, 많은 마오리인들은 자신이 서명한 내용의 실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마오리인들은 자신들의 땅과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 질병, 전쟁, 그리고 토지 상실로 인해 마오리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 마오리의 문화와 전통은 억압받았으며, 많은 마오리인들이 지정된 보호구역(reserve)으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영국인: 식민지 건설과 약속 불이행

  • 와이탕이 조약 체결 이후 영국은 뉴질랜드에 정식 식민지를 수립했습니다.
  •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법률, 관습, 생활 방식을 그대로 들여왔습니다.
  • 영국 정착민들은 종종 논란이 될 만한 방식으로 마오리의 광대한 토지를 차지했습니다.
  • 무엇보다 영국 정부는 조약에서 약속한 내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이는 마오리와의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파케하(Pākehā): 식민지화의 수혜자

  • 파케하는 영국, 아일랜드,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뉴질랜드로 이주한 비마오리 정착민들을 가리킵니다.
  • 그들은 토지를 확보하고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화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누렸습니다.
  • 동시에 파케하는 식민지 사회에서 권력과 영향력 있는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면서, 마오리 억압 구조에 가담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조약의 유산

와이탕이 조약의 서명은 뉴질랜드의 마오리, 영국인, 파케하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마오리에게는 토지와 주권을 잃는 아픔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오늘날 그들이 '탕가타 웨누아(tangata whenua, 땅의 사람들)'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이 재판소(Waitangi Tribunal)를 통해 역사적 잘못을 검토하고 마오리에게 토지와 금전적 배상을 하는 등, 조약의 유산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와이탕이 조약은 단순한 역사 문서를 넘어 현대 뉴질랜드 사회의 정체성과 화해의 과정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