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가 끝나고 진(晉)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통치는 짧았고, 흉노 유연(劉淵)이 일으킨 영가의 난(永嘉之亂)으로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중원은 다시 오호십육국이라 불리는 전란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 와중에 사마의의 후손인 사마예(司馬叡)는 강남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晉)을 건국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동진 건국의 공신이자 동진의 실권을 쥐었던 '랑야왕씨(琅琊王氏)'라 불린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랑야왕씨의 시조, 왕상(王祥)

랑야(琅琊)는 지명으로, 오늘날 산둥성 일대를 가리킵니다. '랑야왕씨'라 불리는 가문은 삼국시대에 살았던 왕상(王祥)에서 비롯됩니다.
왕상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경에 태어났지만, 삼국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군웅들이 중원을 호령하던 시기, 왕상은 은거 상태로 지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왕상처럼 관계(官界)에 나서지 않고 은거한 '명사'들이 많았습니다. 제갈량 자공명도 유비의 삼고초려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사마의 역시 순욱의 추천이 없었다면 계속 숨어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왕상은 한나라 때 명문 집안 출신으로, 외척들의 갈등을 싫어해 벼슬을 받지 않았습니다. 왕상 역시 그 뒤를 따라 은거했지만, 그 명성은 여전히 높았다고 합니다.
당시 청류파라 불리던 명사들과 환관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했고, 환관들이 청류파를 탄압하면서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당고의 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갈등이 풀리지 않아 폭발한 것이 황건적의 난이었습니다. 탁월한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왕상은 특히 청류파 명사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았으며, 훗날 24효(二十四孝)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순욱 같은 청류 명사를 포용할 수 있었기에 조조는 그만큼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조가 왕상에게 주목하지 않은 것은 의외입니다. 아마도 왕상이 벼슬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왕상이 처음 벼슬길에 오른 것은 60세 때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조조가 죽고, 조비·조예 등 조씨 일족이 몰락한 뒤였으며, 대신 사마의와 그의 아들들이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왕상은 사마씨 일족에게 크게 중용되어, 260년에는 삼공의 하나인 사공(司空)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군사를 총괄하는 태위(太尉)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69년,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서진 시대의 왕씨
삼국을 통일한 무제(武帝) 사마염도 어두운 인물이자 폭군이었지만, 그의 아들 혜제(惠帝)는 세계사적으로 봐도 손꼽히는 최악의 암군이었습니다.
"상품에는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에는 세족(勢族)이 없다"(上品無寒門 下品無勢族)
이 말이 진나라 시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진은 극단적인 귀족 사회였고, 왕씨는 그 서열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왕씨의 일원인 왕융(王戎)은 진나라에 미래가 없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목장과 사업을 일으켜 이익을 챙기는 한편, '죽림칠현'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청담(淸談)'이라 불리던 명사 모임에 열중하는 등 명성도 함께 높여 갔습니다.
그의 사촌 왕연(王衍)은 중앙에서 승진해 삼공의 반열에 올랐고, 왕씨는 진나라 최고의 명문가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왕연이 진나라를 주도하던 무렵, 사마씨 일족 간의 항쟁인 '팔왕의 난'이 일어났고, 그 틈을 탄 흉노가 '영가의 난'을 일으키면서 진나라는 멸망 위기에 처합니다.
왕도(王導)와 왕돈(王敦)
팔왕의 난이 일어나면서 사마씨 내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낭야왕(琅邪王) 사마예는 왕도의 조언에 따라 중원을 포기하고 강남으로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강남에는 예전 오나라의 신하들이 있었지만, 왕도는 그들 내부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해 세력을 점차 확장해 갔습니다.
결국 영가의 난으로 진이 멸망하자, 왕도는 사마예와 함께 동진을 건국합니다.
동진은 처음부터 대귀족들이 권력을 쥔 매우 불안한 기반 위에 세워진 국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중심에는 왕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촌 왕돈과 함께 동진 내부의 권력을 장악하고, 사마예에게 복종하지 않는 호족들을 차례로 평정했습니다.
내정에 밝은 왕도와 무재(武才)에 뛰어난 왕돈의 콤비는 이미 사마예의 권력을 능가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왕돈은 대장군을 비롯해 강주·형주 등 요직을 겸임하며 황제를 능가하는 병력을 쥐게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사마예는 정치 중심에서 물러나 왕씨 외의 귀족들을 기용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갈등은 깊어져 갑니다.
왕돈의 난
사마예에게 반기를 든 왕돈은 "임금 곁의 간신을 제거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마예가 중용하던 유괴(劉隗)를 축출한다며 수도 건강(建康)을 향해 진군을 개시합니다.
이에 놀란 사마예는 왕돈을 승상(丞相)에 임명했고, 왕돈은 사마예가 중용하던 인사들을 숙청하며 동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윽고 사마예가 죽고 그의 아들이 명제(明帝)로 즉위합니다. 왕돈은 찬탈의 야심을 드러내지만, 32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59세. 그가 더 오래 살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의 왕씨
왕도는 왕돈의 죽음 이후에도 고개를 숙이며 버텼습니다. 그 사이 명제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고, 뒤이어 암군과 어린 황제들이 이어졌습니다. 왕도는 이런 흐름 속에서도 지위를 지키며 왕씨의 권세를 되살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흐름 속에서, 훗날 '서성(書聖)'이라 불릴 대서법가 왕희지(王羲之)가 태어납니다.
이후에도 왕씨의 번영은 계속되어, 동진이 멸망한 뒤에도 강남의 대귀족으로서 육조 시대를 살아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