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끈 '워싱턴 행진'과 링컨 기념관에서 울려 퍼진 그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은 누구나 아는 역사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70년 가까이 전, 워싱턴에서 이미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또 다른 행진이 열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로 '콕시의 군대(Coxey's Army)'라 불리는 1894년의 실업자 행진입니다.
행진의 이름은 이 계획을 구상하고 직접 이끈 제이콥 세클러 콕시(Jacob Sechler Coxey)에서 따온 것입니다. 오하이오주 매실런(Massillon)에 거주하던 콕시는 1893년, 도시에서 불과 8km 떨어진 자신의 채석장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져 있었고, 실업자 수만 약 3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짧은 거리였지만 도로 사정이 나빠 여정은 험난했습니다. 훗날 '콕시 장군'으로 불리게 되는 그는 이곳에서 하나의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나라에 300만 명의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이들이 도로 건설 같은 공공사업에 투입되면 서로의 처지를 동시에 개선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콕시는 주 재정과 지역 은행을 통해 공공사업(도로 건설, 고용 창출, 주택 건설)을 추진하는 프로그램 초안 작성에 착수했습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그는 칼 브라운(Carl Brown)을 만나 자신의 구상을 공유했고, 브라운은 곧바로 프로젝트에 동참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를 현실화하려면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실업자들과 함께 워싱턴으로 행진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5월 1일 수도에 도착해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연설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라고 결론 내린 것도 이때였습니다.
그들의 구상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실업자들이 여러 갈래의 행진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대는 3월 25일 매실런(콕시의 거주지)을 출발해 4월 13일 워싱턴에 도착했습니다. 본대 규모는 약 400명으로 추산되며, 수도에서는 약 2,000명의 실업자가 추가로 합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들은 콕시가 5월 1일 정오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요청은 승인되지 않았지만 명시적으로 거부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콕시의 군대'는 의사당 건물로 진격했고, 콕시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머지 인원은 인근 거리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경찰 분견대가 그의 앞길을 막섰고, 항의 문서 한 줄 읽지 못하게 한 채 그를 축출했습니다. 콕시와 브라운, 그리고 다른 활동가들은 체포되어 잔디를 밟고 덤불을 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1인당 벌금 5달러와 징역 20일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처음으로, 높은 실업률 속에서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공공근로 계획을 입법자들이 착수하도록 요구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제안은 1895년 1월 8일 하원에서 논의되었으나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백미는 따로 있습니다. 1914년, 콕시는 무려 20년 만에 워싱턴에서 또 한 번 행진을 조직했습니다. 이번에는 국회의사당 산책로를 지나 상원과 하원에서 같은 법안을 옹호하는 연설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최종 성공은 아니었지만, 이 법안은 11개의 서로 다른 입법부에서 최대 11차례나 상정될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했습니다.
저는 박스카 버사, 길 위의 자매의 자서전(Boxcar Bertha, Autobiography of a Sister of the Road)이라는 책을 통해 '콕시의 군대 행진'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호보헤미아(hobo-hemia)'라 불리는 독특한 사회 운동을 다룬 벤 라이트먼(Ben Reitman)의 저술로, 이 주제는 예전 '호보 칼리지' 관련 포스트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이러한 주변부·반문화 운동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미지 | 콕시의 군대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