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는 사퇴, 그리고 위기의 승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재임 중 사퇴라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물러나면서, 위기 속의 백악관을 떠맡은 인물이 바로 제럴드 루돌프 포드(Gerald Rudolf Ford)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포드 자신보다는 그가 지명한 부통령, 즉 록펠러 가문 출신의 넬슨 록펠러가 대중에게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제럴드 포드

포드는 1913년 네브래스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정 폭력을 일삼았고, 친정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이혼 소송을 끝낸 뒤 '제럴드 포드'라는 이름의 남성과 재혼했습니다. 이때 포드는 양부의 이름을 따라 '제럴드 루돌프 포드 주니어'로 개명했습니다.
네브래스카에서 태어났지만 미시간주에서 성장한 포드는 미시간 대학에 진학했고, 학창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전미 대표급으로 꼽힐 만큼 유망한 선수였다고 전해집니다.
졸업 후에는 NFL 팀들의 입단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예일 대학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선에 참전했고, 종전 후에는 장교 계급으로 예편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9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25년간 연방 하원의원으로 재직했습니다. 이 기간에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워런 위원회에 참여했으며, 소수자를 위한 시민권법 입법에도 기여했습니다.
제38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1973년, 당시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가 주지사 시절의 뇌물 수수 의혹으로 사퇴하자 닉슨 대통령은 포드를 후임 부통령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4년, 닉슨 자신도 워터게이트 사건 연루 의혹으로 사퇴했고, 포드는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승격되어 미국 제38대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참고로 포드는 국민의 직접 선거를 거치지 않고 부통령과 대통령직을 모두 수행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지지율 하락과 재선 실패
그러나 포드의 대통령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취임 직후 닉슨에 대한 '전면 사면'을 선언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를 상대로 진행된 구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마야구에스호 사건 같은 안보 실수까지 겹쳤습니다. 오일 쇼크의 후폭풍으로 인한 경기 침체가 지속되었는데도 뚜렷한 처방을 내놓지 못하면서, 결국 다음 대선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포드의 말년
2006년 12월, 제럴드 루돌프 포드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제럴드 포드에 대한 평가
포드는 사실상 닉슨의 실패를 고스란히 떠안은 대통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의 지지율은 닉슨의 실정으로 급락했고, 의회는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며,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마저 겹친 상황이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을 포드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포드 본인은 닉슨과 달리 정치적으로 청렴한 인물이었고, 대통령직의 품위와 권위를 회복하려는 자세로 훗날 많은 대통령들에게 존경받았습니다.
외교에서도 닉슨 시대부터 함께한 키신저를 적극 활용해 중국을 방문하고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회담하는 등 군비 축소와 데탕트(긴장 완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유럽의 헬싱키 최종 문서 채택에도 기여하는 등 평가할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어떤 면에서 감정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닉슨 사면 선언 한 건이 포드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포드가 중용한 럼즈펠드 등이 훗날 부시 부자 행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어 걸프전과 이라크 전쟁을 주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포드는 훗날 걸프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포드의 정책을 돌아보면,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며 전쟁을 정리했을 뿐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하원의원 시절 시민권 운동을 지지했던 행보까지 고려하면 포드가 인간적으로 온건하고 결백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곧 훌륭한 대통령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제럴드 포드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어려운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