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가 가장 깊이 신뢰했던 의사 중 한 명은 비드고슈치 인근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맥스 야콥슨(Max Jacobson). 1960년대 말까지 그는 미국 사회 최상류층 인사들을 돌보며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 심지어 사람 태반까지 처방한 인물이다.
베를린에서 뉴욕으로
맥스(본명 모셰) 야콥슨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다. 어떤 기록은 1900년이라 하고, 또 다른 기록은 1903년으로 적고 있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있다. 그는 당시 독일 제국령이었던 포르돈(Fordon), 즉 오늘날 비드고슈치의 한 구역에서 유대인 정육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야콥슨은 의학 교육을 받고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날로 깊어지던 반유대주의 분위기는 그를 조국 밖으로 내몰았다. 1936년 그는 뉴욕으로 건너가 맨해튼에 개인 의원을 열었다. 바로 이 진료소에서 그는 훗날 미국 엘리트 사회 전체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비타민 칵테일'을 완성해 갔다.
케네디 가족을 촬영한 사진작가로 잘 알려진 마크 쇼는 만성 암페타민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셀럽들을 사로잡은 '미라클 맥스'
야콥슨은 순식간에 '미라클 맥스(Miracle Max)', '닥터 필굿(Dr. Feelgood)'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뉴욕의 가장 세련되고 비싼 동네는 물론 할리우드 언덕에서까지 환자를 찾아냈다. 비결은 그가 아직 베를린 시절부터 연구하기 시작한 각성 주사였다. 호르몬, 스테로이드, 효소, 사람 태반, 프로카인, 비타민 A·B·C·D에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까지 섞은 극단적인 혼합물로, 당시 의학 문헌들은 이런 성분을 신경 질환 치료에 권장하고 있었다.
주사를 맞은 환자들은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고양감을 느꼈다. 머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열리고, 몸은 움직이고 싶어졌으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았다. 바로 이러한 경험이 최고의 스타들을 야콥슨의 진료실로 끌어모았다.
그의 환자 명단에는 트루먼 카포티, 주디 갈런드, 말레나 디트리히, 넬슨 록펠러, 빌리 와일더, 마리아 칼라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디 피셔, 테네시 윌리엄스,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마릴린 먼로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마릴린 먼로에게 야콥슨은 1962년 5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 앞에 서기 전 무대 공포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특제 칵테일을 건넸다. 그날 대통령은 유명한 "Happy Birthday" 노래와 함께 45세 생일을 축하받았다. 그로부터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시대의 섹시 심벌이었던 먼로는 바르비투르산계 약물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난다.
맥스 야콥슨은 수많은 스타들의 건강을 책임졌다. 그중에는 마릴린 먼로도 있었다.
그러나 야콥슨의 손길이 닿은 곳은 부자와 유명인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환자는 다름 아닌 JFK 자신이었다. 케네디는 미국 제35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이 의사를 찾았고, 두 사람의 인연은 국가 원수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케네디 가문 측근 한 명의 죽음에도 일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JFK를 위한 '비타민 칵테일'
마흔 초반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존 F. 케네디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학생 시절 미식축구 경기에서 입은 심각한 허리 부상 때문에 그는 평생 극심한 요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를 밤잠 설치게 만든 것은 더 심각한 문제였다. 대선 출마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병이었다. 케네디는 애디슨병(부신피질 기능저하증)과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앓고 있었다. 여기에 위장과 장 질환까지 겹쳐 잦은 설사와 체중 감소를 겪었고,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이어져 불면증까지 불러왔다.
케네디 가에서 강력한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이미 일상이었지만,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말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선거 참모진 중 한 명인 척 스펄딩(Chuck Spalding)의 인연을 통해 그는 '닥터 필굿'의 진료실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60년 9월 리처드 닉슨과의 TV 토론, 그리고 이어진 대선 전체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후두에 직접 놓인 야콥슨의 주사 덕분이었다고 한다.
1960년 9월, 후두에 직접 주입된 야콥슨의 주사가 닉슨과의 토론 승리, 그리고 대선 전체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맥스 야콥슨은 JFK의 거의 모든 중요한 순간에 함께했다. 그는 백악관을 직접 찾아 대통령을 진찰했고, 해외 순방에도 동행했다. 서독과 동독 간 평화조약을 논의하기 위해 니키타 흐루쇼프와 빈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도, 케네디는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야콥슨에게 여러 차례 '비타민 주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닥터 필굿'의 처방에 부작용이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사 중독은 물론 우울증, 불안, 과잉 성욕이 환자들을 괴롭혔다. JFK 본인도 칵테일을 과량 맞은 뒤인 1962년, 뉴욕 칼라일 호텔 복도를 알몸으로 뛰어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대통령의 의료진은 점점 더 많은 의문을 낳던 야콥슨의 독특한 '특효약' 문제를 들어 그와의 관계를 제한하도록 압박했고, 이는 결국 닥터 필굿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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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 그리고 경력의 끝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진료 행위는 정당한 의혹을 사기 시작했다. 많은 스타들은 방문할 때마다 혈압 측정 같은 기본적인 검사조차 거치지 않은 채 비정형적인 치료가 진행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게다가 야콥슨 치료의 부작용에 대한 소문은 갈수록 늘어갔다. 그리고 1969년, 케네디 가족 촬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마크 쇼(Mark Shaw)가 만성 암페타민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기울었다.
이러한 정보들이 쌓이자 뉴욕 타임스는 기자단 조사에 나섰고, 마침내 '미라클 맥스'의 진짜 얼굴을 폭로했다. 1972년 12월 4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는 그의 경력에 마지막 못을 박는 결정타가 되었다.
맥스 야콥슨은 1960년대 말까지 미국 사회 최상류층의 건강을 관리했다.
의사는 비전문적 행위로 혐의를 받게 되었고, 그를 고발한 증인들 중에는 직원과 동료는 물론 환자들도 있었다. 마약 및 위험 의약품 관리국은 그의 처방 과정에서 수많은 비위행위를 적발했다.
조사 과정에서 칵테일 제조에 쓰인 암페타민의 규모도 드러났다. 맥스 야콥슨은 일주일에 약 1,920회 분량의 자신의 '마법의 약'을 처방한 것으로 밝혀졌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돈을 위해 개업한 것이 아니라, 돌볼 수 있는 셀럽들의 이름 그 자체를 위해 진료를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재클린 케네디조차 남편이 그에게 서비스료를 지불했다는 사실은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다고 털어놓아야 했다.
맥스 야콥슨의 재판은 1975년, 의사 면허 취소로 막을 내렸다. 4년 뒤 '닥터 필굿'은 빚과 잊힌 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