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풍화되어서는 안 될 미국 역사의 어두운 단면 — 드레드 스콧 사건과 그 판결

풍화되어서는 안 될 미국 역사의 어두운 단면 — 드레드 스콧 사건과 그 판결

대학 세미나에서 '미국 법'을 주제로 공부하며 '드레드 스콧 대 샌퍼드 사건(Dred Scott v. Sandford)'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세계사 교과서는 남북전쟁을 노예 해방 전쟁으로 가르치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토니 모리슨의 소설 『빌러비드(Beloved)』를 읽고 오랜만에 이 사건을 접하게 되어, 이번에는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된 '드레드 스콧 사건'을 짚어보려 합니다.

연방 국가로서의 미국

미국의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하나의 통일된 국가라기보다 여러 주가 모인 연합체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각 주는 사실상 하나의 나라처럼 자체적인 입법권을 가지며, 주마다 법률이 다릅니다.

사건이 일어난 19세기 기준으로 흑인 노예를 해방할 수 있는 '자유주(Free State)'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주도 있었습니다.

미국 남부는 주로 플랜테이션 농업을 운영했으며, 값싼 노동력인 흑인 노예에 의존했습니다. 면화를 영국으로 수출하기 용이한 자유무역은 목화 생산이 주력인 남부에 유리한 정책이었습니다.

반면 북부는 공업화되어 노예 노동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고, 영국 공산품과의 경쟁을 피한다는 측면에서 보호무역이 유리했습니다.

이처럼 정책 차이로 인해 북부와 남부 간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드레드 스콧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주리 타협

드레드 스콧 사건의 배경으로서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1820년 미주리가 주로 승격될 때 자유주로 할 것인가 노예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남북 간 갈등이 벌어졌고, 결국 미주리 자체는 노예주가 되되, 북위 36도 30분 이북의 모든 주는 자유주로 하기로 하는 타협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합의는 '미주리 타협'이라 불립니다.

드레드 스콧 사건

1795년생인 드레드 스콧은 노예로 태어났으며, 1833년 미국 육군의 존 에머슨 소령에게 매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머슨은 3년간 일리노이에서 근무했는데, 일리노이는 자유주였습니다.

에머슨이 일리노이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미네소타로 이주했을 때, 드레드 스콧은 그곳에서 결혼했습니다.

이후 에머슨은 미주리로 이주했고, 드레드 스콧 부부는 에머슨의 아내에게 고용 형태로 넘겨졌습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요점은 분명합니다. 일리노이와 미네소타에서는 노예 제도 자체가 불법이었는데, 미주리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미국 법의 모순이 핵심 쟁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에머슨은 루이지애나와 자유 영토인 아이오와 준주로 이주했고, 루이지애나에서 드레드 스콧은 다시 에머슨의 아내에게 빌려졌습니다.

1840년 에머슨이 사망하자 스콧은 그의 아내의 소유 노예가 되었지만, 1846년 스콧은 자유주를 거쳐 왔기 때문에 자신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뒤집힌 판결들

드레드 스콧은 1심에서 승리했습니다. 에머슨 측이 항소했지만, 드레드 스콧은 2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미주리 대법원은 스콧이 노예라고 판결하며 기존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이 판결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계속되었습니다.

미주리의 판례상 노예가 자유주를 지나면 자유민이 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당시 판결을 내린 미주리 대법원 판사 해밀턴은 다수의 노예를 소유한 인물로 유명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결했다는 비판을 전국적으로 받게 됩니다.

이 상황은 당시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의 우려거리가 되었고, 지지율 하락을 두려워한 뷰캐넌은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여러 수작을 벌였다고 전해집니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당시 미국은 서부로 계속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캔자스와 네브래스카가 준주가 되면서, 두 지역이 장래 주로 승격될 때 자유주로 할 것인지 노예주로 할 것인지를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두 지역 모두 북위 36도 30분 이북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미주리 타협은 사실상 폐기되었습니다.

이 법은 1854년 3월 의회를 통과하여 미국의 공식 법률이 되었습니다.

이 법에 반대하는 세력은 결국 대규모 정당으로 성장했고, 이것이 오늘날 미국 양대 정당 중 하나인 공화당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연방 대법원의 판결

무대를 연방 법원으로 옮긴 드레드 스콧 사건의 최종 판결은 1857년 3월, 로저 B. 테니(Roger B. Taney) 대법관에 의해 선고되었습니다.

판결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연방 헌법은 애초에 흑인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흑인에게는 소송을 제기할 권리조차 없다.
(2) 흑인은 자유주에 살더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 노예제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다.

놀랍게도 이것이 미국의 결론이었습니다.

연방 법원이 흑인에게 시민권이 없다고 직접 판결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흑인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미국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국가가 주도하여 노예제를 유지하려 한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민주주의는 고대 로마 수준에도 크게 못 미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의 나라'라는 말을 들으면 경탄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 때문인지, 드레드 스콧 사건을 다루는 교과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빛나야 하니까요.

아름다운 나라이기에.

사건의 영향과 링컨, 그리고 남북전쟁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미국 역시 이런 불합리한 판결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드레드 스콧 판결 3년 후, 노예 해방을 주장하던 공화당 소속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합니다.

이에 맞서 남부 여러 주는 연방을 탈퇴하고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의 건국을 선언했고, 양측은 미국의 내전, 즉 남북전쟁(Civil War)에 돌입하게 됩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을 생각하며

드레드 스콧 사건은 미국 역사에서 로사 파크스 사건과 함께 매우 중요한 판결입니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존재를 동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긍정적인 부분만 바라보곤 합니다.

이제는 미국의 부정적인 부분도 자세히 들여다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은 많습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등이 그 예입니다.

미국의 흑인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영화 『앨라배마 스토리』가 보여주듯 남부에서는 흑인이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는 현실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빈부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흑인 문제는 미국 역사 속 과거의 이야기처럼 여겨지지만, 모든 역사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있습니다.

드레드 스콧과 같은 연방 법원의 판결은, 정의가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정부가 결정한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교육적 관점에서 볼 때, '드레드 스콧 사건'은 교과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사람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